■특집/월남 선생이 꿈꾸었던 민주공화정
■특집/월남 선생이 꿈꾸었던 민주공화정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12.21 18:29
  • 호수 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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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임시정부 민주공화정 뿌리는 만민공동회
월남 선생 신민회 주도하며 공화정 싹 키워

 

▲ 종로에 모인 민중. 만민공동회로 추측되는 사진.(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 광화문 촛불집회에 모인 인파

‘최순실 게이트’에서 촉발된 대규모 촛불집회는 ‘주권자 혁명’으로 불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바로 국민이며 이에 따라 국체는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조는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군주정, 입헌군주정, 공화정 등으로 나뉜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군주정이었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임시정부가 태어났다. 1910년 4월 10일에 개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임시헌법) 10개조’를 채택했다. 임시 헌장은 권력의 소재를 군주에서 국민으로 옮기고 민주공화제를 선언해 정부형태와 국정운영에서 민족 역사상 가장 큰 변혁을 가져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189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민권 운동이 이같은 변혁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구한말 민권운동의 중심에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있다. 월남 선생의 민권 운동의 돌아본다.

◇월남 선생과 만민공동회 투쟁

1894년 갑오농민전쟁 실패 후 서양 제국주의 열강과 일본은 조선 정부로부터 각종 경제적 이권을 빼앗아가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세력 팽창은 유럽 제국주의 열강을 자극하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세 나라는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중국에 반환할 것을 일본 정부에 종용했다. 이같은 ‘3국간섭’에 대항할 수 없었던 일본은 결국 요동반도를 도로 내주었으며 이후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 및 제국주의 침략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19세기 말의 민권 운동은 1989년 대중적 집회인 만민공동회 투쟁으로 나타났다. 1898년 3월10일 오후에 1차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서울 종로에는 1만여 인파가 몰려들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7만 명이었다 하니 이 대회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하다. 장안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유례가 없었다.
독립협회에서 주최·주관하고 이상재 선생이 사회를 본 이 대회에서 러시아와 외세의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는 연설이 주종을 이루었다.

만민공동회 개최는 친러 수구파 정부 대신들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에 머물고 있던 외교관들에게도 경악할 만한 큰 충격이었다. 외국인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 순하디 순하여 무엇이든 빼앗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조선의 민중들이 그토록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만민공동회는 대성공이었다. 러시아는 그달 17일 조세명목으로 차용하려 했던 절영도 석탄창고 기지 요구를 철회했으며 또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철수하겠다는 정식공문을 대한제국 정부에 통고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은 그달 19일 서둘러 군사교관을 해고하고 러시아 재정고문 알렉시에프도 해임하여 돌려보냈다. 노한은행 역시 철폐됐다. 러시아가 동방정책에 일대 충격을 받자 일본도 국익에 손해가 올 것을 우려한 나머지 서둘러 이전에 빼앗아간 절영도 석탄창고 기지를 대한제국에 반납하고 민심의 동태를 살폈다.

만민공동회는 계속 이어졌다. 초기에는 참여한 사람들이 주로 지식인과 소상인들이었으나 점점 확대되어 학생, 교원, 종교인, 하층민까지 참여했다. 시민들은 점차 신분을 초월하여 나라의 일을 논의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자유로이 발표했으며, 스스로 대표자를 뽑아 만민공동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등 독립협회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양상을 띠었다.
 
◇입헌군주제 실현 앞두고 좌절

1898년 10월 7일부터 12일까지 종로에서 2차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군중은 친러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철야 투쟁이 광범위한 민중의 호응을 얻게 되자 독립협회는 집회를 더욱 확대하면서 심순택, 윤용성, 이재순, 심상훈, 민영기, 신기선, 이인우 등 7대신 파면과 전면 개각을 요구하는 세 번째 상소를 올리며 그 수위를 올려나갔다.

결국 고종은 10일과 12일에 걸쳐 7대신을 모두 파면시켰고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박정양을 정부 수반으로 삼는 개혁파 정부를 탄생시켰다. 민중의 힘을 등에 업은 이상재 선생을 비롯한 애국적 지식인들의 상소는 마침내 효과를 거둔 것이다.

월남 선생은 백성들의 권리를 왕권의 상위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또 관료는 임금의 신하인 동시에 백성의 종이라고 표현했다. 월남 선생은 불평등을 척결하기 위하여 백정 박성춘이 만민공동회에서 연설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불평등사회에서 평등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월남 선생은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만민공동회의 주도세력은 신정부와의 협의하에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뒤 의회 설립안을 정부에 제출한 것이다. 개혁파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11월 5일 한국 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원하기로 하고 중추원 신관제(中樞院新官制 : 의회설립법)를 공포했다. 승세를 탄 만민공동회는 1898년 10월 28일에서 11월 2일까지 6일간 종로에서 대집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서울시민은 물론 독립협회, 국민협회, 일진회 그리고 정부대표로 의정부 참정 박정양 등 10여명의 정부 대신들이 참석하여 관민공동회로 불리기도 했다.

만민공동회는 10월 29일 6개항의 개혁 원칙을 결의하고 이를 황제에게 헌의(獻議)하기로 하였다. 이날 결의된 헌의6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인에게 의부(依附)하지 말 것. 둘째, 외국과의 이권계약을 대신(大臣)이 단독으로 하지 말 것. 셋째, 재정을 공정히 하고 예산을 공표할 것. 넷째, 중대 범인의 공판과 언론·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다섯째, 칙임관의 임명은 중의(衆議)에 따를 것. 여섯째, 기타 별항의 규칙을 실천할 것 등이다. 이 결의를 받아들여 고종은 헌의6조를 재가하고 이를 실천할 것을 약속했다.
 
◇ 군대 투입으로 만민공동회 해산

그러나 개혁파 정부는 의회 설립 하루 전인 11월 4일 밤에 붕괴되었다. 의회가 설립되어 개혁파 정부와 연합하면 영원히 정권에서 배제되는 것이라고 판단한 친러 수구파는 독립협회 등이 의회를 설립하려는 것은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무대신 등으로 한 공화정(共和政)으로 국체(國體)를 바꾸려는 것이라는 내용의 익명서(匿名書 : 비밀전단)를 뿌린 것이다. 이에 고종은 자신이 폐위된다는 모략 보고에 놀라 11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걸쳐 독립협회 간부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키고 의회 설립령을 취소했다.

11월 5일 이상재 등 17명의 지도자들이 경무청에 체포되었으며, 개혁파 정부가 붕괴되고 친러 수구파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서울 시민들은 삽시간에 수천명이 경무청 문 앞에 모여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열고 17명의 지도자 석방을 요구하면서 만 6일간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 시위하였다. 고종은 병력을 사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자 친러 수구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11월 10일 오후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고종과 수구파들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해서 황국협회 아래에 조직되어 있는 지방 보부상들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이 때 일본공사 가토(加藤增雄)가 일본도 명치유신 초기에 군대로써 민회를 해산시킨 전례가 있음을 들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일거에 탄압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고종은 마침내 군대 동원의 결단을 내려 12월 23일 친위대에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명했다. 12월 25일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불법화시키고 해체령을 포고하였으며, 430여 명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일거에 체포, 구금했다.

만민공동회는 강제해산당했지만 898년의 가장 위험한 시기에 한반도까지 진출한 제정러시아를 요동반도로 후퇴시키고 국제 세력 균형을 형성하여 열강의 침략을 일단 저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때 획득된 세력 균형은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때까지 만 6년간 지속됐다. 또한 수많은 애국적 인사들을 배양하였으며 자유민권사상, 즉 민주주의사상을 시민들 사이에 보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월남 선생의 신민회 활동

신민회(新民會)의 산실은 상동교회였다. 상동교회는 1885년 5월 서울에 도착한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이 세운 교회이다. 그는 1886년 정동병원을 설립하고 병원 선교를 시작했는데, 1887년 남대문 근처 상동으로 병원을 옮기고 1893년 상동교회를 설립하여 초대 담임목사에 취임했다. 1896년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숯장수 출신의 전덕기가 이 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상동교회에서 근무했는데 그는 1904년 상동청년학원을 개설해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끌어갔다.

이 무렵 기독교를 받아들인 월남 선생은 상동교회에서 전덕기를 비롯 이회영, 김구, 이동녕, 이동휘, 신채호, 박용만 등을 비롯 많은 애국적 지식인들과 우국지사들을 만났다. 또한 월남 선생은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 YMCA 교육부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고종의 부름을 받아 의정부 참찬에 머물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관직을 사퇴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교육, 계몽운동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 신민회라는 비밀 조직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07년 4월 초에 안창호의 발기에 의하여, 양기탁을 총감독으로 양기탁ㆍ전덕기ㆍ이동휘ㆍ이동녕ㆍ이갑ㆍ유동열ㆍ안창호 등이 창건 위원이 되고 이상재, 이회영, 최광옥ㆍ노백린ㆍ이승훈ㆍ안태국ㆍ이상재ㆍ윤치호ㆍ조성환ㆍ김구ㆍ박은식ㆍ신채호ㆍ이강ㆍ임천정ㆍ이종호ㆍ주진호 등이 중심이 되어 비밀 결사 신민회가 창립됐다.

신민회의 회원은 전국에 걸쳐 약 800명에 달하였으며 당시 전국 각지의 개화 자강회 애국 인사의 정예는 모두 망라되어 있었다. 월남 선생은 신민회의 주도적 인물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政體)를 공화정으로 한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인 입헌군주제를 탈피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고, 실력의 양성을 위해 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新民)’을 주창했다.

신민회는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을 계기로 조직이 드러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무너졌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이면서도 스스로 비합법적인 반일활동을 회칙으로 부정함으로써 한말 계몽운동의 일반적 한계였던 합법주의와 문화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맹점도 있었다.

그러나 국권을 빼앗긴 1910년을 전후하여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전쟁으로 운동노선을 전환함으로써 이후 만주와 중국에서 일어난 독립군전쟁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실질적인 밑거름이 되었으며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 후 임시의정원장(오늘의 국회의장)이 된 이동녕을 비롯해 많은 신민회 인사들이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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