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 3천만의 생명을 파묻어 죽이다니
■모시장터/ 3천만의 생명을 파묻어 죽이다니
  • 박병상 칼럼위원
  • 승인 2017.02.15 16:44
  • 호수 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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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세계는 일명 ‘스페인독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학자들은 당시 인구의 2%에서 5%인 4천만에서 1억 명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스페인에서 바이러스가 창궐한 건 아니었다. 당시 중립국이던 스페인의 언론만이 검열을 받지 않아 참상을 왜곡하지 않았기에 그런 명칭이 붙었다.

1918년 스페인독감도 발생 초기 그리 무섭지 않았지만 인도에서 세계로 퍼지며 강력해졌다고 추정한다. 세계적으로 최소 4천만 명을 희생시켰어도 내용을 분석하면 위생과 면역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흉작으로 인한 기아가 만연한 상황에서 막대한 희생자를 낳았던 인도처럼 유럽도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젊은이가 지저분한 참호에서 많이 희생되었다. 수십만이 죽은 미국도 주로 빈곤층이었다.

미국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은 멕시코에서 세계 최대 양돈기업인 미국의 ‘스미스필드푸드’가 문제를 일으켰다. 수백만 마리의 돼지를 사육하면서 위생시설을 제대로 가동하지 않은 것이다. 2009년 희생된 멕시코인은 비위생 상태에 노출되었고 낯선 질병에 보건당국이 대처할 시간이 부족했지만 도시 중산층의 희생은 크지 않았다. 수천의 희생자를 낳은 미국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도 대부분 빈곤층이거나 노약자가 희생되었고 우리도 사정이 비슷했다. 동물복지를 고려해 돼지를 사육했다면 원천적으로 피할 수 있는 질병이었다.

이번 우리나라에 창궐한 조류독감으로 3000만 마리 이상의 닭과 오리가 살처분되었다. 하도 무리하게 살처분해 파묻는 과정에서 공무원이 과로사할 지경이었다. 축산협동조합은 살처분 인력을 계약직에 한정해 빈축을 샀는데, 파묻힌 3000만 생명들은 가만히 두면 조류독감으로 희생될 운명이었을까?

2004년 이후 거의 격년으로 조류독감이 발생했는데, 그 전에 조류독감이 없었을 리 없다. 이제껏 근 6천만 마리를 생매장했는데, 그 중 몇 마리나 조류독감에 감염되었을까? 6000만 마리의 극히 일부, 천 마리도 못될지 모른다. 감염되었더라도 대부분 회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이나 돼지처럼.

독성이 무서워진 스페인독감이나 신종플루에 감염된 사람의 절대다수는 거뜬히 나았다. 2004년 이전 우리 땅에서 사육하던 닭과 오리들도 조류독감에 걸려도 대부분 나았을 것인데, 요즘은 왜 불문곡직 죽일까? 살처분에 참여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한동안 환청, 공포 속에 파묻히는 닭과 오리의 비명에 시달린다는데, 그렇게 생매장되는 닭과 오리는 산업축산에서 그저 고기 덩어리일 뿐, 생명을 가진 존재로 취급되지 않는다. 빨리 많은 고기와 계란을 낳아야 하는 생산라인에 불과하다.

요즘 김밥에 계란이 젓가락처럼 가늘어졌거나 아예 사라졌다. 방학이긴 해도, 대학가 주점에서 인기 높았던 계란말이도 슬며시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관세를 없앨 뿐 아니라 항공료를 지원하겠다며 정부가 장려해도 수익성이 분명치 않아 그런지, 상인들은 양계업자의 불만과 관계없이 수입을 꺼린다. 계란 가격은 당분간 내려가지 않을 텐데, 이러다 계란 없는 식단에 익숙해지는 건 아닐까?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 하나 얹은 친구 부러워하던 시절처럼?

우리나라는 해마다 8억 마리의 닭을 먹는다. 이번에 살처분한 3000만 마리보다 훨씬 수가 많은데, 대부분 지나치게 어린 닭이다. 부화한 지 4주에서 5주 만에 도살되는 닭은 시원한 바람과 밝은 햇빛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대한 기계에 발목이 걸려 자동으로 도살, 가공, 포장, 맥도날드햄버거 프랜차이즈 전 세계의 가맹점보다 많은 치킨점으로 운송돼 팔려나간다. 조류독감이 창궐할 조건이 충분하다. 조류독감이 사람에게 번질 가능성도 그만큼 커질 텐데, 이 기회에 좀 자제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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