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 특집/서천의 독립유공자들
■ 광복절 특집/서천의 독립유공자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7.08.16 16:07
  • 호수 8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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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서훈 총 39인…마산·신장 3.1운동 관련 13인
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정찬경…광복군 출신 김상을
비인 장포리 문석환, 민종식·최익현과 함께 의병 일으켜

한 나라가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면 독립을 위해 일한 사람들부터 기리는 것이 상식이다. 1948년 해방이 된지 3년 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지만 이승만 정부 내내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과 이시영 부통령의 단 2인 뿐이었다. 1962년 일부 서훈이 이루어졌고 1990년 이후에야 본격적인 서훈이 시작됐다. 뉴스서천이 광복 72주년을 맞아 서천군청사회복지실 사회복지정책팀(담당 전종성 주무관)으로부터  2017년 현재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서천 출신의 독립유공자 명단을 확보해 이를 싣는다.(월남 이상재 선생과 김인전 선생은 지면부족으로 제외함)<편집자>

▲ 서천의 독립유공자들
◆고시상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4월 29일 송기면(宋箕勉)이 주도해 일으킨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날 오후 1시경 그는 신장리 장터에서 2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송기면의 지휘 아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때 출동한 일본 경찰이 주동자 송기면과 유성렬(劉性烈)을 잡아 경찰출장소로 연행했다. 이에 그는 양재흥(梁在興)·박재엽(朴在燁)·김인두(金印斗) 등과 합세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해 경찰출장소로 몰려가서 창문 유리와 기물을 파괴하며 강제로 연행 당한 송기면 외 6명의 동지를 탈출시키고 계속 시위를 했다. 이에 일본 경찰이 발포해 양재홍 등이 흉탄에 맞아 부상하자, 그는 “나도 쏘아 죽이라”고 순사보 이한규(李翰圭)에게 대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갑수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5년 월남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남양(南陽)대학에 다니면서 여운형(呂運亨)·서병호(徐炳浩)·조동호(趙東祜) 등과 교유했다. 그는 여운형이 이끄는 전 중국대학 축구 대표선수로 선발돼 필리핀에 원정을 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했다. 또한 상해의 재해외(在海外) 조선인유학생회를 주도했다. 1918년 애국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진입했으나 군산에서 일경에게 잡혀 고문을 받다가 한국인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해 상해로 갔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 당시 그는 임시정부 발행채권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북 임피(任陂)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노력했다. 그 후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선으로 독일 베를린에 유학 중 베를린 고려학우회(高麗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26년 귀국해 이상재의 권유로 배재학교 교감으로 7개월간 근무했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동흥(東興)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927년 다시 귀국한 그는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전북 완주 봉동에서 윤건중(尹建重)이 설립한 봉우산업조합에 참여해 이사로 활동하다가 1938년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김상을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북경으로 망명해 한국청년전지공작원과 접선되어 활동하던 중 1940년 11월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했다. 그는 북경에서 상주하면서 전후방 연락, 동지초모공작, 지하공작 등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1945년 8월 한미합작 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 파괴반을 수료하고 국내 정진군 전라도반의 제1조에 편성되어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김영헌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42년 2월 배재중학교(培材中學校)에 재학할 때 학우인 신낙현(申洛鉉)·정준영(鄭俊永)과 같이 민족의 독립을 목적으로 항일투쟁을 계획한 그는 1944년 6월 충남 서천군(舒川郡) 문산면(文山面) 문장리(文章里) 자택에서 신낙현(申洛鉉)·김옥돈(金玉敦)·한정헌(韓楨憲)에게 “조선독립사상을 버리지 말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후 동년 7월 19일 '일본 제국주의는 반드시 패망한다는 것과 우리 민족은 조국의 독립이나 민족해방을 위하여 궐기할 것'이라는 내용의 전단 400여 매를 종로(鐘路) 및 광화문(光化門) 일대에 배포하고, 이어 8월 서울에 소재한 함평여관(咸平旅館)에서 신낙현(申洛鉉)과 같이 당시 일본 수상이던 동조영기(東條英機)를 비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됐다. 1945년 4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으로 출옥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김인두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4월 29일 송기면(宋箕勉)이 주도해 일으킨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날 오후 1시경 그는 신장리 장터에서 2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장터 여러 곳을 행진시위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송기면과 유성렬(劉性烈) 등 6명이 경찰출장소로 강제 연행되는 것을 보았다. 이에 그는 고시상(高時相)·양재흥(梁在興)·박재엽(朴在燁) 등과 함께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해 경찰출장소로 몰려가, 창문 유리와 기물을 파괴하며 연행당한 동지를 구출하다가 체포됐다. 이해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인애
1919년 3월 13일 전북 전주군(全州郡) 전주면(全州面) 남문(南門) 밖 시장, 대정정(大正町) 우편국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동월(同月) 12일 밤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학생이었던 김인애는 임영신(任永信) 등 13명의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품고 동지의 집에 모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거사 당일 정오 이들이 준비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니 군중들도 이에 호응해 독립만세를 불렀다. 김인애는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유치장으로 들어가면서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은 단식으로 저항하며 독립항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또한 일본 검사가 위압된 자세로 복종을 강요하자, 이들은 ‘우리가 어찌 너희들의 판결에 복종할 자이랴? 너희들은 우리의 강토를 강탈하고 우리의 부형을 학살한 강도이거늘 도리어 3천리 강산에 주인이 되려는 우리를 비법이라 하니 이는 비법한 판결이다’라고 역설했다. 결국 김인애는 3개월 여의 옥고를 치른 후 1919년 6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출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탁환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10월 서울에서 일본 경찰로 가장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0월 2일 김강(金剛)ㆍ한호범(韓鎬範)ㆍ이경헌(李景憲) 등과 함께 서울 평동(平洞)에서 회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협의했다. 한호범ㆍ이경헌은 서울 수창동(需昌洞) 홍종욱(洪鍾郁)에게 ‘조선총독부 경무국 사법계 형사 김영희’, ‘조선총독부 경무부 경부 김탁’이라고 새긴 명함을 제시하면서, “자신들은 형사ㆍ순사인데 김탁 경부의 명령이므로 동(同) 경부의 사택으로 동행하자”며 홍종욱을 김강의 집에 이르게 했다. 김탁환 등은 홍종욱에게 '경성부 애국금수합위원(愛國金收合委員)' 사령서(辭令書)를 보이며, 자신들이 조선독립의 운동비를 모집하는 사람임을 밝히고 독립운동자금을 요청했다. 이에 홍종욱이 한일은행 서대문출장소에 예입한 통장의 인장을 교부해 170원을 모집했다. 같은 해 10월 4일에는 서울 공평동(公平洞) 전동여관에 묵고 있던 이남종(李南鍾)에게도 2000원을 모집했다. 김탁환은 1919년 10월 22일 종로경찰서에 체포된 뒤 1920년 3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 및 강도죄, 가택 침입죄 등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나상준
1919년 3월 29일 서천군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에서 장날을 이용해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송기면(宋箕勉)·유성렬(劉性烈)·이근호(李根浩)·임학규(林學圭) 등과 함께 장날인 이날 오후 1시경 장터에 모인 2000여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송기면이 높은 데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유성렬과 같이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이에 따라 군중들도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했다. 이때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일경에게 체포됐다. 같은 해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소요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공소해 7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었으나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문태근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문태근은 충남 서천군(舒川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서천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9일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腸里) 장터에서였다. 장날을 이용해 3ㆍ1운동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기독교인 송기면(宋基勉)은 유성열, 이근호 등과 논의하고 29일 낮 1시경 장터에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송기면이 단 위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호응하여 시위에 들어갔다. 일경이 송기면 등 6명을 체포하자 격분한 군중 2000여명은 경찰주재소를 공격하고 6명을 구출한 다음 주재소를 부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찰이 총을 쏘아 2명이 부상당했다. 군중들은 한산 쪽으로 시위를 계속하다가 결국 해산됐다. 신장리 독립만세사건에 이어 4월 30일에는 종천면(鍾川面) 화산리(花山里)에서 2000여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 후 체포된 문태근은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박재엽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4월 29일 송기면(宋箕勉)이 주도해 일으킨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이날 오후 1시경 송기면의 지휘 아래 신장리 장터에서 2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때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송기면과 유성렬(劉性烈) 등 6명이 경찰출장소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그는 고시상(高時相)·양재흥(梁在興)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해 경찰출장소로 몰려가,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창문 유리와 기물을 파괴하고 연행 당한 동지를 탈출시켰다. 그리고 출장소 안으로 들어가 일본 경찰을 구타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됐다. 그는 이해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백치서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나아가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해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백치서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김경명(金景明)의진에 참여해 국권회복에 나섰다. 그리하여 1907년 11∼12월 충남 은진군(恩津郡)과 정산군(定山郡)을 공략했으며 십수 차례에 걸쳐 충남 각처에서 군자금을 수합하고 부일배를 처단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탄환의 조달이 목전의 문제가 되었다. 그는 이를 위해 1908년 1월 서울에 잠입해 중국 상점에서 탄환을 구입했으나 귀대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자 틈을 보아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됐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송기면
기독교인(基督敎人)으로서 평소 일본의 침략에 의해 국권이 침탈됨에 불만을 가지고 대한의 독립을 염원해 오던 중,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고향인 마산면(馬山面)의 거사(擧事)를 계획했다.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집에서 태극기 200여 매를 만든 다음, 이튿날 같은 교인 유성렬(劉性烈)·이근호(李根浩)·임학규(林學圭)를 방문해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4월 29일 신장리(新場里)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거사일인 4월 29일 동지들과 함께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가지고 장터에 나가,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역설했다. 2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장터를 행진하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그는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송기주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전북 옥구(沃溝)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가 처음 옥구군에 전달된 것은 3월 1일이었다. 서울에서 귀향한 김병수(金炳洙)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함께 서울의 시위상황을 전해들은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 박연세(朴淵世), 이두열(李斗悅) 등은 거사계획을 협의했다. 당시 개정면 구암리(龜岩里) 기독교병원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송기주도 이와 같은 계획에 참여했다. 이들은 3월 6일의 군산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런데 거사 전날인 3월 5일 거사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주도자들이 일경에 연행됐다. 거사가 좌절되기 직전에 놓이자 교사 김윤실(金潤實)과 영명학교 학생들은 긴급회의를 갖고 그 즉시 만세시위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영명학교 학생들과 기독교 계통의 여학생이 합류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군산시내로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시위 도중에 기독교 신도들과 주민들, 보통학교 학생들도 참여해 시위대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군산시내의 시민들도 학생들의 거사에 감격해 행렬에 동참하였다. 학생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배부되고 태극기도 전해졌다. 당황한 적경들은 이리 주재 헌병대의 응원을 얻어 주동 인사들을 검속하고 군중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송기주도 이 일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출판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송여직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4월 29일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에서 동생 송기면(宋箕勉)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이날 동생 송기면이 신장리 장터에 모인 2000여 명의 장꾼들 앞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는 것을 보고, 시위군중과 합류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를 행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이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신현창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서주(徐州) 지구에서 일본군 병영을 탈출해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는 총사령부 부관처에 배속돼 광복군 부위로 근무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유성렬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4월 28일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에서, 송기면(宋箕勉)·이근호(李根浩)·임학규(林學圭)등 기독교인(基督敎人)들과 함께 이튿날의 신장리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송기면이 미리 제작한 태극기 200여 매를 가지고 장터로 나아가, 모여드는 장꾼들에게 나누어주며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역설했다. 그는 2000여 명이 운집한 장터에서 송기면과 함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장터를 행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결국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유희준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같은 고향에 거주하는 한우석(韓禹錫)·태석(泰錫) 형제와 함께 1929년 11월 군자금 모집을 위해 대전군(大田郡) 기성면(杞城面) 용촌리(龍村里)에 거주하는 정순학(鄭淳學)의 집에 잠입했다가 체포됐다. 이 일로 인해 그는 1930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강도상해죄로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이근호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4월 28일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에서 송기면(宋箕勉)·유성렬(劉性烈)·임학규(林學圭)등 기독교인(基督敎人)들과 함께 이튿날의 신장리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합의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송기면이 미리 제작한 태극기 200여매를 가지고 장터로 나아가, 모여드는 장꾼들에게 나누어주며 독립만세운동에 같이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는 2000여 명이 운집한 장터에서 송기면과 함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장터를 행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송기면과 유성렬이 강제로 경찰 출장소로 연행당하자 나상준(羅相俊)과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해  태극기를 흔들며 경찰출장소로 돌진하다가 체포됐다. 그는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이남률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전북 군산(群山)에서 문종묵(文鍾默)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리하여 군중을 규합하기 위해 동월 15∼16일 전후 3회에 걸쳐 김군익(金君益) 등에 대해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토록 설득했고, 3월 17일에는 권재길(權在吉)과 함께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의 영명학교에서 생도들에게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도록 권유했다. 이어 3월 22일 오후 8시경 김수남(金壽南)과 함께 군산 명치동(明治洞) 노상에서 학생들의 민족의지를 탄압하는 군산보통학교(群山普通學校)에 방화할 것을 계획하고 이튿날 23일 알콜〔酒精〕1파운드를 구입해 방화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그 해 5월 2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방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7월 12일 대구복심법원과 9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사성
충남 서천 출신이다. 1906년 5월 11일에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진(洪州義陣)에 가담해  선봉장 박영두(朴永斗)와 함께 소모장에 임명됐다. 그후 유격장 이한구(李漢龜)와 같이 임천(林川)·한산(韓山) 등지의 의병을 모집하고자 임천(林川)에 도착했다가 붙잡혀 동년 11월 23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소위 “정사(政事)를 변경할 목적으로 난을 일으키는 율(律)”로 유배 10년을 언도받았다. 그 뒤 1906년부터 1923년까지 서천군(舒川郡) 한산면(韓山面) 송림리(松林里)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1919년에는 손병희(孫秉熙)가 주도하는 3·1독립운동에도 참여했으며, 일경의 이목을 피해 부안군(扶安郡) 위도면(蝟島面) 진리(鎭里)에서 은거했으나 생활고 때문에 7년간의 걸식생활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이승달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서천군 한산면 송곡리(韓山面 松谷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송기면(宋箕勉) 등과 마산면 신장리(馬山面 新場里)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1919년 3월 29일 하오에 신장리 장터에서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군중을 선동해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주동자가 검거되자 이에 항의해 주재소를 습격했다. 이때 그는 돌아가는 장꾼들에게 합세할 것을 역설해 검거자 구출운동을 격렬하게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고 7월 26일 경성복심법원과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항고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임종연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20년 7월 17일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민단(朝鮮民團) 주최 강연회에서 독립사상을 고취(鼓吹)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 말라’는 연제(演題)로 ‘우리민족은 분기(奮起)하여 독립을 관철하여야 한다’'고 강연함으로써 참석한 천수백명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고 독립사상을 앙양(昻揚)했다가 체포됐다.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았으며 11월여 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임학규
충청남도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4월 28일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에서 송기면(宋箕勉)의 지휘아래 전개된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4월 28일 송기면·이근호(李根浩)·유성렬(劉性烈)등 기독교인(基督敎人)들과 함께 이튿날의 신장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계획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송기면이 미리 제작한 태극기 200여매를 동지들과 함께 가지고 장터로 나아가, 모여드는 장꾼들에게 나누어주며 독립만세운동에 같이 참여하도록 권유했다. 그는 2000여명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의해 송기면과 유성렬이 강제로 경찰 출장소로 연행당하고, 뒤이어 이근호와 나상준(羅相俊)까지 연행되자,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출장소로 몰려가 연행자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 외치다가 체포됐다. 그는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정일창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馬山面 新場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송기면(宋箕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29일 신장리 장날에 대규모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처음에는 독립만세운동으로 벌어졌고 다음에는 피검자 구출운동으로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송여진(宋如眞)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군중을 규합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고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배후에서 시위군중을 격려 지휘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그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고 7월 26일 경성복심법원과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정해두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06년 4월 충남 홍산(鴻山)에서 민종식(閔宗植) 의병장이 기의하자 입진, 후군장(後軍將)에 선임되었다. 4월 16일 홍산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천(舒川)·남포(藍浦)·보령(保寧)을 지나 26일 홍주성(洪州城)을 함락시켰다. 그 후 병력이 증강되는 한편 주민들이 동원되어 성첩이 수축되면서 5월 25일경부터 진용 재편성에 들어갔는데, 이때 선봉장(先鋒將)에 임명됐다. 같은 해 5월 31일 홍주성이 함락될 때 까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며 활동했으며 홍주성이 함락될 당시 체포돼 모진 고문을 겪다가 6개월 만에 반신불수가 되어 석방되었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조남명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4일 서천군 화양면(華陽面) 금당리(琴堂里)에서 유재경(劉載璟)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받고 3월 6∼7일 이틀간 화양면 구동리(九洞里)의 한백희(韓伯熙)·최경진(崔敬鎭) 및 기산면(麒山面) 화산리(華山里) 이경욱(李敬旭)·정희석(鄭凞錫) 등에게 “학생들도 국사를 위하여 활동하는 데 우리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안, 준비를 갖추다가 사전에 발각돼 일경에 체포됐다. 그는 3월 8일 압송 도중에 장터에 이르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해 4월 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최락권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공주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6년 3월에 동교생 구자훈(具滋勳)·김해인(金海仁)·천영관(千永寬) 등과 함께 항일결사 명랑(明朗)클럽을 조직했다고 한다. 이들은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사용금지(日語使用禁止)·신사참배거부(神社參拜拒否)·악질일인교유배척 등을 전개하는 한편 무궁화식수장려 및 미신타파 등 계몽활동을 펴면서 민족의식 고양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졸업한 후 동회원이었던 천영관이 1942년 6월경에 일제의 패망을 언급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이로 인해 동 클럽의 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그도 일경에 체포됐다. 붙잡힌 뒤 그는 1942년 9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2월 31일에 출옥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함수만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전주 신흥(新興)학교 학생들은 이에 호응해 동교의 개교 22주년 기념일인 동년 12월 15일경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으나 일경의 저지로 해산했다. 이때 동교에 재학중이던 그는 재차 만세시위를 계획해 태극기 및 결의문 등을 준비하고 1930년 1월 25일에 동교생 100여 명을 주도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로써 그는 동교생 24명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때 혹독한 고문의 여독이 심하여 일단 풀려났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30년 5월에 전주예수병원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허완
1919년 3월 29일 충남 서천군(舒川郡)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에서 기독교인 송기면(宋基勉)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송기면은 이날 오후 1시경 장터에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군중 2000여 명과 함께 이에 호응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일본 경찰은 시위 군중을 제지하며 송기면 등 6명을 연행했다. 분노한 군중은 경찰 출장소를 습격해 6명을 구출한 후 그곳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때 경찰이 총을 쏘아 2명이 부상당하자 군중들은 더욱 격분해 한산(韓山) 쪽으로 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일경의 총탄 발사로 해산됐다. 허완은 이날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5일 서천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정도
1908년 음력 3월경 충남 한산(韓山)ㆍ서천(舒川)ㆍ임천(林川) 등지에서 정찬경의진(鄭贊敬義陣)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충남 한산 출신의 정찬경은 1907년 연산(連山)에서 김득수(金得洙)와 함께 창의해 한산ㆍ서천 일대에서 활동했다. 1909년 5월 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천군 황동리(黃洞里)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7월 일본군 홍산수비대(鴻山守備隊)에 피살, 순국했다. 김정도는 1908년 음력 3월 중에 정찬경의진에 참여해 동료 13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한산ㆍ서천ㆍ임천 등지에서 한산순사주재소(韓山巡査駐在所)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1908년 9월 21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0년 대사령(大赦令)에 의해 출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유형식
1909년 4월 충남 임천군(林川郡, 현 부여군)과 한산군(韓山郡, 현 서천군) 일원에서 이장준(李章俊)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인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장준은 1908년 3월부터 1909년 3월까지 의병장 조농운(趙弄云)과 노백인(盧伯仁) 휘하에서 동료 의병 30~130여 명과 총기를 휴대하고 충남 임천ㆍ서천(舒川)ㆍ남포(藍浦)ㆍ비인(庇仁)ㆍ한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한산주재소에서 총기 등을 획득했으며, 재무주사 송규헌(宋珪憲)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했다. 유형식은 1909년 4월 이장준 등 의병 6명과 함께 서천군 방죽동(方竹洞) 우 모로부터 8원 80전, 한산군 나교(羅橋) 박승유(朴承有)로부터 3원을 군자금으로 모집했다. 이어 4월 13일에는 한산군 하북면(下北面) 월명리(月明里) 부근에서 밀정 1명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1909년 6월 21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 및 강도죄로 종신징역을 받고 공소했으나, 1909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영규
1908년 음력 3월 충남 한산(韓山)ㆍ서천(舒川)ㆍ임천(林川) 일대에서 정찬경의진(鄭贊敬義陣)에 참여해 한산순사주재소(韓山巡査駐在所)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충남 한산 출신의 정찬경은 1907년 연산(連山)에서 김득수(金得洙)와 함께 창의(倡義)해 한산ㆍ서천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1909년 5월 약 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천군 황동리(黃洞里)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7월 일본군 홍산수비대(鴻山守備隊)에 의해 피살, 순국했다. 이영규는 김정도(金正道)와 함께 1908년 음력 3월 정찬경의진에 참여해 동료 의병 13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한산ㆍ서천ㆍ임천 등지에서 한산순사주재소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08년 8월 체포됐다. 1908년 9월 21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10년을 받고 2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1910년 대사령(大赦令)에 의해 출옥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정찬경
충남 한산(韓山)에 거주하였다. 의병장(義兵將)으로 충남 한산·서천(舒川) 등지에서 활동했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국권이 피탈되고,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정찬경은 1907년 충남 연산에서 김득수(金得洙)와 함께 거의해 한산·서천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1909년 5월 약 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충남 서천군 황동리(黃洞里)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동년 7월 홍산수비대(鴻山守備隊)에 의해 피살,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삼석
충남 비인(庇仁) 출신으로 1908년 4월부터 1909년 6월까지 이소선의진(李素仙義陣)에 소속되어 충남 비인·남포(藍浦)·홍산(鴻山)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이소선은 충북 청주(淸州) 출신의 의병장으로 그 휘하에 약 4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충남 남포·비인지방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 7월 4일 남포헌병대(藍浦憲兵隊)에 의해 남포군 습의면(習衣面) 간치시장(艮峙市場)에서 체포됐다. 김삼석은 1908년 4월경부터 이소선의 휘하에서 비인·남포·홍산 일원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08년 6월 28일 귀향했다. 이에 비인주재소(庇仁駐在所) 순사에 의해 체포됐다. 소위 내란방조죄(內亂幇助罪)로 기소되어 1908년 7월 19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이에 공소해 1909년 9월 1일 기각되어 형을 살던 중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문석환
충청남도 비인(庇仁)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1906년 1월 4일 민종식(閔宗植)·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 일으킬 것을 결의했다. 최익현은 윤 4월 13일(6월 4일) 태인(泰仁)에서 거의하기로 하고, 민종식은 4월 18일(5월 11일) 의거하기로 결정했다. 문석환은 민종식의 의진에 입대해 종사(從事)가 되었다. 민종식 의진은 충청도 홍산 지치(鴻山 支峙)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렸다. 이들은 남포에서 다시 보령(保寧)을 지나 결성(結城)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주(洪州, 지금의 洪城)로 진격해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호서(湖西)지방의 요충인 홍주성을 무난히 차지한 의병진은 곧 민중들을 안심시킨 후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드리고 피를 마시며 구국전투에 몸을 바칠 것을 맹서하고 진용을 정비했다. 이 때 문석환은 서기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의진의 지도부 인사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대장 민종식 소모관 이만식 참모장 김광우 조희수 채광묵 수문장 최선재 중군장 정재호 황영수 이세영 수성장 조병순 유격장 채경도 선봉장 이남규 박영두 좌군관 윤필구 윤병일 송순묵 후군장 정해도 우군관 이병년 이범구 홍순대 운량관 박제현 성재평 소모장 지우범 이들 홍주의진에 대한 적의 대공세가 전개되자 이에 의진은 병력 증강과 성첩의 수축 등으로 대처했으나, 윤 4월 9일 다시 적의 공세가 급하여지고 새벽 3시경 큰 폭음과 함께 성 동문이 깨어지고 수많은 적군이 문안으로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의진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탄환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흩어져 이미 전세는 패색이 짙어졌다.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대장 민종식 등은 성을 탈출해 재거를 기약할 수 있었으나 문석환을 비롯한 80여 명이 체포, 압송돼 서울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6월 상순에 이르러 70여 명이 석방되고 문석환은 남규진(南奎振)·유준근(柳濬根)·이 식(李 )·신현두(申鉉斗)·이상두(李相斗)·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과 더불어 적을 끊임없이 꾸짖고 굽히지 않으므로 대마도(對馬島)로 귀양보내어졌다. 유배지에서 문석환은 많은 우국시를 지었는데 그 중의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바다 서남쪽에 자리잡은 한 섬 산을 지나 비 내리니 자못 서늘하구나 석양의 매미소리는 고향과 같으나 언어·의관이 다르구나 나그네 아홉 사람 고초를 겪으면서 만리 밖 고국의 안부를 편지로 들으니 지난 일을 생각하니 혼미한 꿈속 인양 하구나 일의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인가!” (海水西南闢一灣 爲容九人同苦楚過山乍雨動微寒 寄書萬里報平安晩樹蟬聲如故國 回息過境渾如夢殊方鵠舌異衣冠 成敗由天力難) 8월말에 태인(泰仁)·순창(淳昌) 의진의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이 대마도로 유배되어 와서 홍주 9의사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모두 학문 있고 또 의기가 높던 인물들이었으므로 눈물로 해후했다. 이들은 유형지의 외로움을 시로써 달래면서 살았다. 면암의 칠언절구에 대해 문석환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본디 바탕이 어디 간들 바뀌리 위아래가 거꾸로 바뀐 세상 옛 성인이 오늘의 세태를 가엾이 여겨 이러한 제도를 가르치셨으니 의식을 보존해야만 하리.” (素行隨處我無移 冠屢那堪倒置時先聖應憐今日事 故敎此制保形儀)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살던 중 연로한 면암이 병석에 눕자 문석환을 비롯한 의사들이 병구완했으나 끝내 면암은 유형지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면암의 장례에서 문석환은 사서(司書)를 맡아 정중히 모셨으며, 그 후에는 고국에서 온 운구반에 인계됐다. 문석환과 나머지 9인은 적의 감언이설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옥고를 치르다가 소위 조선 총독 장곡(長谷)의 특전(特典)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됐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최봉석
1908년 음력 1월부터 3월까지 충남 서천(舒川) 등지에서 지석홍의진(池錫弘義陣)과 이소선의진(李笑先義陣)에 참여해 활동했다. 지석홍의진은 충남 남포군(藍浦郡) 습의면(習衣面) 일원에서, 이소선의진은 충남 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蘿面)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이다. 최봉석은 1908년 음력 1월 15일 지석홍의진에 참여해 6~7일 정도 활동했으며, 같은 해 음력 2월 9일 이소선의진의 서기(書記)로 충남의 노포(蘆浦)ㆍ비인 등지에서 5~6일간 활동하다가 귀향했다. 그후 음력 3월 16일에 다시 이소선의진에 참여하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귀향했다가 체포됐다. 1908년 8월 22일 공주구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도수종죄(暴徒隨從罪)로 태(笞) 10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정리/허정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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