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산책 책에 청춘을 묻은 실학자 이덕무
■ 고전산책 책에 청춘을 묻은 실학자 이덕무
  • 송우영 시민기자
  • 승인 2017.09.13 14:42
  • 호수 8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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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는 말은 의미조차도 입 밖에 내서도 안 되고 글로 써 놔도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에게 무슨 말 끝에 ‘나는 가난하다.’ 는 말을 했다면 그 말을 들은 부유한 사람은 생각하기를 저 가난뱅이가 나에게 뭔가를 얻어내려는 속셈이구나. 라고 생각 할 것이니 이는 불쾌한 일이다.

공자의 제자 안연(顏淵)은 지독히 가난해 풀뿌리 캐 먹고 물만 마시면서 살았어도 큰 부자친구 자공(子貢)에게 단 한 번도 가난을 말한 적이 없다. 가난한데 어쩌란 말인가. 오직 가난을 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가난이 익숙해지면 저절로 남에게 가난을 말하지 않게 된다. ‘패관장동유벽서(稗官將東遊壁書)’에 “선비는 입에서 배고픔을 말하지 아니하고(사불언기士不言飢), 군자는 차라리 죽을망정 입으로 가난을 말하지 않으며(군자영사빈불영君子寗死貧不詠)대장부는 구차하게 재물을 빌리지 않나니(丈夫窮苦不借財), 빚지는 순간 노예다.(債卽奴)”는 구절이 있다.

가난이 주는 뒤틀린 욕망은 말과 행동의 과잉이다. 어려서부터 지독한 수신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이 몸에서 베어나오는 가난을 빼고 상대방에게 필연적 언어만 말한다는 것이 수신이라는 자기훈련 없이 가당키나 하랴.

사실 가난한 사람은 여름에도 춥고 깃털조차도 무겁다. 가난의 삶이란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불안함의 연속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터졌다 하면 그들에게는 재앙이 되고 생존의 위협이 된다. 가난한 사람은 사방천지가 아프다. 찾고 돌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외로워서 아프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 마음이 아프고 가난해서 제대로 못 먹으니 몸이 아프다. 이렇게 아픔을 일용할 양식처럼 먹고산다.

이 지경까지 이른 조선 선비가 있었으니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이다. 과거를 보기조차 어려웠던 서얼출신이었던 그는 날 때부터 가난했지만 가난에 대한 매몰 비용을 지불한 적이 없이 오롯이 18세까지 혀를 물고서라도 공부만 했다. 맑으나 비가 오나 독서를 했고(晴雨兩讀) 낮이건 밤이건 독서해서(晝夜通讀) 말을 신중하게 하고(君子無易由言) 남을 비방하지 않는(耳屬于垣) 경지까지 자신을 끌어올렸다.

19세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살던 집을 ‘구서재(九書齋)’라는 이름으로 개인도서관으로 꾸민다. 구서란 책 읽는 독서(讀書), 책 보는 간서(看書), 책을 소장하는 장서(藏書), 책 내용을 발췌하는 초서(抄書), 책을 교정하는 교서(校書), 책에 평론을 쓰는 평서(評書), 책을 짓는 저서(著書), 책을 빌리는 차서(借書), 책을 햇볕에 쬐이는 폭서(曝書)를 말한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과는 태생적으로 거리가 먼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책에다 청춘을 묻었고 엄청난 양의 책을 쓴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가난과 싸워 이기기보다는 가난을 몸의 일부인 양 달고 살면서 가난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을 만들어 갔던 선비였다. 정조의 부름을 받아 규장각에서 일했다. 그가 죽자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한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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