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책/가을 볕을 벗 삼아 공부하다
■고전산책/가을 볕을 벗 삼아 공부하다
  • 송우영 시민기자
  • 승인 2017.09.27 17:36
  • 호수 8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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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수도인 장안으로부터 남쪽 방향으로 반나절 거리인 성남(城南)이라는 마을에 별장을 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일인자 한유(韓愈)는 과거를 준비하는 아들에게 권학문(勸學文)으로 응원의 부(符)를 지어주는데 그 글이 바로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이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명문이다.

때는 가을이라 장마도 그치고<시추적우제時秋積雨霽>
서늘한 바람 마을에 가득한데<신량입교허新凉入郊墟>
등잔과 가까워질 시간 아닌가<등화초가친燈火稍可親>
책을 편다면 이보다 더 좋으랴<간편가서권簡編可舒卷>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버지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오직 공부. 그게 전부다. 그런데 정작 자식은 목숨 걸고 죽어라 공부를 하지 않아 여느 가정마다의 심각성은 있다.
“공부하지 않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한 겨울 맨발로 눈길을 걷는 거와 같다.”
죽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고통이다 는 말이다. 주경학자(註經學者) 정암(靜嵒) 박윤선(朴允善)의 말이다.

“공부하지 않는 자 언젠가는 인생의 절벽을 만난다.”
서진(西晉)때 시인 육기(陸機)의 말이다.

“연못 가 봄풀은 채 꿈도 깨지 않았는데<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
계단 앞에 오동나무 잎은 벌써 가을을 알리는구나<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이 시는 주자가 우연히 지었다는 권학시 우성(偶成)의 3.4구이다. 봄과 가을을 말했는데 이는 계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 공부 하라는 말이다.

내가 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선의의 경쟁자는 책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경책이기도 하다. 주자의 산문시는 더 직설적이다.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 있다고 말하지 말라<물위금일불학이유래일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올해 배우지 않고 내년 있다고 말하지 말라<물위금년불학이유내년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세월은 흘러가되<일월서의日月逝矣>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세불아연歲不我延>
아<嗚呼> 이미 늙었거늘<노의老矣> 누구를 탓하랴<시수지건是誰之愆>”

 32세 때 추흥부秋興賦를 지으며 자신의 머리카락 두 올이 희어진 것을 한탄하면서 32세를 이모지년二毛之年이라고 부른 육기(陸機)의 친구 반악(潘岳)은 먼저 간 아내를 애도하는 도망시(悼亡詩) 기이(其二) 4句에서 ‘욕서수절란(溽暑隨節闌)’이라 했다. 아무리 더워도 결국 가을은 온다는 말이다. 이 말은 행간을 읽어야하는 부분인데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게 없다는 말도 되고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좋은날 온다는 말도 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세상 말에 속지마라.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은 거다. 다만 늦은 만큼 할 수는 있다는 말이다.
1년 중에서 공부하기가 가장 좋다는 황금률의 시간들로 가득한 천고마비의 계절, 허균은 “이 청명한 가을날 군자가 지키고자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채워 뒷사람에게 남기는 것이다.<淸明之秋 君子之屯 以嬴其身 俾遺後人>”라고 했다. 중종 때 대사헌을 지낸 설옹 양연은 자신의 몸을 채우는 최선의 방책은 ‘추양학우秋陽學友’이라했다. 가을볕을 벗 삼아 공부한다는 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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