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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김환영의 그림책 세상 (4)농사꾼들이 만든 23권의 그림책
“난 이렇게 살았어!”
부여 송정마을 노인들의 ‘내 인생의 그림책’
2017년 09월 27일 (수) 17:45:27 김환영 시민기자 news@newssc.co.kr

   
▲ 부여 송정마을 노인들이 그린 그림책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품고 삽니다. 드러내 말하든 가슴에 두고 살든, 사는 동안 잊히지 않는 일들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 찬 곳인지도 모르지요.
서천군과 접한 부여의 송정리는 3년 전부터 ‘그림책마을’을 만들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쓰고 그린 그림책들이 얼마 전에 인쇄되어 나왔습니다. 잊히지 않는 이야기들을 모아 <내 인생의 그림책> 23권을 쏟아낸 것이지요.

   
▲ ▲농가월령가-노재열
《노재열 할아버지의 농가월령가-열두 달 농사 일노래》(노재열, 79세)를 펼쳐봅니다. 표지에는 세 사람이 낫을 들고 벼를 베고 있고 화면 위쪽에는 메뚜기 두 마리가 보입니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겨울은 쉬는 계절여. 12월, 1월, 2월 농한기에 땅도 쉬고 나무도 쉬고 사람도 쉬어. 잘 쉬어야 일도 잘 허고 농사도 잘 지을 수 있어.”
왼쪽의 그림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들에 까치가 앉아 있고, 단출한 시골집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3월부터는 농번기, 일허는 계절”이 시작되고, “씨앗은 뭐뭐뭐를 허며 땅은 어떻게 헐 것인지 계획”을 세워 “4월에는 씨앗을 확인”해 “논 평수에 맞춰서 씨나락허고 모판을 마련”하고 5월에는 모내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쌀값이 싸니께 수확을 빨리 혀서 값을 좋게 받을까, 늦게 혀서 좋게 지을까” 생각도 해야 하고 “늦어도 6월 10일까지는 모를 심”고, 심고 나면 “물이 잘 들어가나 물이 마른 데가 있나 관심”을 가져야 한답니다. “7월에는 모가 쑥쑥 자라” “어느 정도 자라면 이삭거름”을 해야 하며, “이삭거름은 중간밥”이므로 “1년 농사는 7월 이삭거름에 달린 거”라고 세세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8월이 되어 “벼 모가지에 노란 방울을 더듬어 봐서 쭘궁뱅이가 없으면 농사 잘 진” 것이며, “9월이면 벼가 보기 좋게 노래져...” “옛날 같으면 9월에는 앉았을 새가 없”답니다. “새가 벼를 다 빨어먹으니께 나가서 쫓으야” 한다면서요. “논 귀퉁이에 그늘집 혀 놓고 날마다 새를 쫓”는데, “백로 지나면 벼가 딱딱헝게 새가 덜 먹”고, “10월에는 바심(추수)”를 해야 하는데 “옛날 같으면 동지섣달 눈 올 때까지 바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벽부터 밤까지 한 달 내내 쉴 새” 없이 “바심을 끝내야 12월이 오는 거”라고요.

   
▲ 할아버지들
이윽고 바심이 모두 끝나는 12월이 되면 “눈이 펑펑 오면 사랑방 같은 데 모여서” 놀지만,  “농사는 하늘과 자연과 같이 허는 거”라고 농부는 말하고 있습니다. 두 눈을 또록또록 책에 박고 그림을 보는데, 마지막 말씀이 제 가슴에 와서 콱 박힙니다.
“그렁게 밥 많이 잡숴.”
그리고 왼쪽 화면에 ‘밥 많이 잡’수라며 커다란 밥그릇에 고봉밥을 담아놓았습니다. 한편 재미있는 게, 가로로 넓은 논과 달리 세로로 긴 판형이 여의치 않았는지 화가는 많은 장면들을 위 아래로 나누어 그려놓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 호두나무와 청설모와 나
《청솔모와 호두나무와 나》(박남순,79세)는 호두나무를 베어낸 자신의 경험을 그린 그림책입니다. 어느 해 할아버지는 호두나무 열 그루를 심어요. 하지만 다 죽고 한 그루만 남습니다. 그렇게 남은 호두나무에 해마다 호두가 다닥다닥 매달립니다. 그러나 가을만 되면 청솔모가 나타나 잘 익은 호두를 한 알도 안 남기고 죄다 따먹어버리지요.

“호두 한 알이나 먹어 볼라고 함석으로 막고 나무를 매 놓구 별짓을 다 혔”던 할아버지는 결국 한 번도 호두 맛을 보지 못하고 맙니다. 화가 난 할아버지는 “아이구, 급살 맞을 놈의 거!”하며 그예 톱을 들어 호두나무를 싹싹 베어버립니다. “너도 못 먹고 나도 못 먹”자며 말이지요.

그래서 끝이냐고요? 그래요, 이렇게 끝나면 맛이 없지요. 이제는 호두나무도 없고 호두를 까먹던 청설모도 사라진 빈자리에서 할아버지는 지난 일을 떠올리며 혼잣말로 말합니다. “지나고 보니께, 청설모가 쪼매 그립네. 호두나무 다시 심을까?”

이 그림책을 보았을 때 저는 무엇보다 참 과감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지의 호두나무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들도 그랬지만, 나무를 통째로 베어버리는 장면은 가히 놀라웠고 저는 심지어 통쾌하기까지 했습니다. 나 또한 이런 일을 꽤나 당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린이책에서 종종 발견되는 ‘온정주의’가 들어설 틈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 외에도 글을 가르쳐주던《그리운 야학당》(박지순, 84세),《야학당 만들어진 이야기》(박신태, 83세)와《송정마을의 여덟가지 자랑》(박동근, 87세)은 이 마을의 유래를 잘 보여줍니다.《할머니의 꽃밭》(박춘자, 85세)에서 할머니는 잠이 안 오면 마당에 나와 꽃에게 “잘 있냐?”고 묻는답니다.《까치소리》(최순희, 81세),《서울 나들이》(전열귀, 79세),《찌그럭 째그럭》(양예연, 82세),《아버지 두루마기》(김옥이, 74세), 《꽃 심는 닭 이야기》(박송자, 75세)에는 고단했던 여성들이자 어머니들의 삶이 느껴져 가슴이 ‘멍클멍클’합니다.《누룽지》(박동년, 85세)는 먹을 것 없던 가난한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함께 일본순사들에 대한 위압감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고, 《친구 이야기》(박일규, 80세)는 먼저 떠난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습니다. 《저수지 속 내 고향》(허경, 80세)은 일제강점기 고향집이 수몰된 이야기인데, 모두가 8바닥 밖에 안 되는 짧은 이야기들인데도 실감나게 다가온다는 게 참 놀랍습니다.

이 그림책들에서 “그렇게 살았어.”란 마지막 문장들은 마치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옛이야기의 마법처럼 독자에게 모든 걸 수용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3박자의 반복이 일으키는 신기한 마법과도 같아서, 주섬주섬 떠올리는 말들을 담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싶습니다. ‘그렇게 살았어’라는 이 말 속에는, 당신들이 지나온 날들의 회한과 아울러 고단한 삶을 살아낸 분들의 달관한 긍정의 느낌들이 배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느낌은 23권의 그림책들에 고르게 배어 있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 할머니들
이 그림을 그려낸 울퉁불퉁한 손들을 상상해 봅니다. 한 평생 일만 하신 아버지 어머니들의 손이고 여전히 고향에 남아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손입니다. 그 손이 만들어 낸 선들은 모두 삐뚤빼뚤하고 벌벌 떨립니다. 드넓은 대지 위에 평생을 그림 그려온 ‘설치미술가’들의 그림들은 얼핏 예닐곱 먹은 어린아이의 그림들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책들이 신묘하게도 마음을 움직입니다. 나는 이 서툴기만 한 그림들의 힘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뽐내는 일 없이도 당차기만 한 이 그림책들은 저 같은 화가들에게 ‘어깨에 힘을 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책들은 전문가들과는 또 다른 해방감을 안기며 그림책과 그림에 대해 자주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서툰 그림들이 책꼴을 갖추려면 전문가의 도움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사진자료를 앞에 놓고 베껴 그리기도 했을 테고, 부끄러움이 많은 분에게는 용기를 북돋워야 했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이분들이 털어놓는 자기체험의 진정성들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내 인생의 그림’ 그리기였을 것입니다. 흙 묻은 장화와 털신들을 벗어놓고 마을회관에 모여 난감하기만 하던 흰 종이 앞에서 서로 웃고 격려하며 부끄럽게 그려나가던 일, 함께 밥을 나누며 작가와 주민들이 이무로워지기까지의 시간의 누적들이 이 그림책들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을 것입니다.

이 그림책들은 어쩌면 자급자족하며 사시던 분들의 마지막 풍경들을 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림책을 진행하는 도중에 돌아가셔서 마무리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제주시에서 진행하는 그림책들과는 접근방식도 환경도 연령대도 다른, 노인만 남은 벽촌에서 일구어 낸 이 기적 같은 일이 스러져가는 농촌과 응달진 곳에서 알알이 베어 나오는 상상을 해 봅니다.

곧 한가위입니다. <내 인생의 그림책>은 자식과 손자들에게 큰 자부심과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벽화가 그려진 남향받이 송정마을 구경도 하고, 새로 지은 ‘그림책마을찻집’에서 그림책과 함께 차 한 잔 나누는 따듯한 명절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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