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8주년 기념 특집/월남 이상재 선생과 헤이그 평화회의①헤이그평화회의 특사 파견 산파 월남 선생
■창간18주년 기념 특집/월남 이상재 선생과 헤이그 평화회의①헤이그평화회의 특사 파견 산파 월남 선생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7.10.12 21:50
  • 호수 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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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서명 없는 을사늑약 무효…국제사회에 알리자”월남 선생, 헤이그평화회의 특사 파견 준비하다 피체

 

▲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 초청국 명단. 한국은 47개국 중 12번째에 올라 있다.<헤이그 이준열사 기념관>

1899년과 1907년 네덜란드의 행정 수도 헤이그에서 두 차례의 국제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명칭은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 1899(The First Hague Peace Conference, 1899)’와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1907(The Second Hague Peace Conference, 1899)’였다. 당시 국제회의는 양자간 회의였거나 유럽 역내 국가들의 회의였지만 최초로 남미 국가나 아시아 국가들도 참여한 전 세계적인 회의였기 때문에 ‘만국평화회의’로 이름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약 4개월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은 특사를 보내 세계 각국에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해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냉대로 우리 대표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특사들의 혁혁한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실정을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기 위해 이를 준비한 사람은 우리 고장이 낳은 ‘작은 거인’ 월남 이상재 선생이었다. 지난 9월 2일부터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공동취재단 일원으로 독일과 네덜란드의 에너지전환을 취재한 <뉴스서천> 취재진은 헤이그에 머무는 동안 ‘이준 열사 기념관’을 방문해 송창주 관장으로부터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세 특사의 활동을 전해 듣고 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왔다.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에 초대받은 대한제국

1899년에 열린 제1차 헤이그평화회의에 초대된 나라는 모두 26개국이었다. 당시에 57개의 주권국가가 있었다 하는데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 관계로 남미의 국가들이 모두 초청 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상 유럽회의였다. 아시아에서는 청나라와 일본, 태국이 초대됐을 뿐이었다. 대한제국이 초대받지 못한 것은 주최국이었던 러시아가 아관파천 이후 친러 정권의 대한제국을 자신의 몫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한 직후에 열린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주최국인 러시아는 당연히 대한제국을 초청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을 것이다.

1905년 9월 5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맺어지며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결됐다. 이 일로 루즈벨트는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미국은 1905년 7월 을사늑약의 모태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했다.

1905년 9월 13일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는 자국 황제 니꼴라이 2세의 훈령을 받고 “이제 전쟁이 끝났으므로 지금이 제2차 평화회의를 개최할 적기”라는 내용의 외교각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에 미국 정부는 “1차 회의의 미진한 부분을 계속 토의하기 위해 러시아가 회의를 주도할 필요가 있으며, 러일전쟁에서 드러난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해서도 전쟁 당사자였던 러시아가 2차 회의도 주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혀 회의 개최권을 러시아에게 양보했다.

1905년 9월 25일 러시아는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를 위한 초청 서한을 47개 초청국에 보냈다. 초청은 러시아가 주재하는 나라의 러시아 외교관이 주재국 외무장관 앞으로 전달했으며 그 초청 명단에 대한제국도 포함돼 있다.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선전포고가 이루어지자 2월 12일 러시아 공사 파블로비치는 자국의 공사관 관리 등을 프랑스 공사에게 위탁하여 업무를 대리케 하는 한편 철수를 개시해 2월 16일자로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를 빠져나갔다. 이와 아울러 일본의 압력에 따라 양국의 공관 철수는 물론 조약관계를 폐기한다는 대한제국 정부의 선언이 있었으므로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곧장 외교관계 단절상태에 들어갔다.

이 해 3월 한·일간의 의정서 체결에 의해 한국은 강제로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고, 러시아의 적국(敵國)이 되었다. 또한 1904년 3월부터  일본은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한·러조약」’을 폐기시키는 동시에 러시아 주재 한국 공사관도 폐쇄하고 이범진(李範晋) 공사를 비롯해 공사관원을 철수시키도록 요구했다. 러시아 뼤쪠르부르그에 주재한 이범진 공사에게 1904년 3월 4일 철수 명령이 내려졌으나, 고종은 프랑스 외교채널을 통해 철수명령이 일본의 압력에 의한 강제적인 것이었으므로 따라서 철수하지 말라고 밀명을 내렸다.

더구나 러시아가 헤이그평화회의 초청장을 보냈던 9월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 11월 17일 이전이었으므로 대한제국 정부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 초청장을 받았을 것이다.

◇헤이그 특사 파견 ‘산파’ 월남 이상재 선생

 

▲ 1907년 월남 이상재 선생 모습(아랫줄 오른쪽 두번째). 황성기독청년회 지도자들가 함께<출처: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사업회>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이상설의 집을 왕래하던 중 통감부에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다.”

이는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에 실린 월남 선생에 대한 기록이다. 을사늑약 직후 고종 황제의 간곡한 부름에 월남 선생은 1907년 군대 해산이 있을 때까지 의정부 참찬직에 있었다.

한규설(韓圭卨, 1856~1930년)은 무과에 급제한 이후 장위사·의정부 찬성 등을 거쳐 1905년에 의정부 참정을 역임한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정치가이다. 1905년 11월 일본의 전권 대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여러 대신들에게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한규설은 이를 끝까지 반대했다.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혔다. 또한 이회영·이시영 등과 외국 서적을 들여다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을 번역·연구하기도 했다. 의정부 참찬직에 재직하며 을사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후 관복을 벗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민영환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6년 봄 이상설은 이동녕·정순만 등과 조국을 떠나 상하이와 블라지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추(煙秋)로 가서 이범윤(李範允)과 국권회복 운동의 방략을 협의한 후 이해 8월 북간도 용정으로 갔다. 이곳에서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어 이동녕 등과 함께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이같은 이상설 일행의 해외 망명을 역사학계 일부에서도 앞으로 있을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을 위한 사전 준비로 보고 있으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주도로 계획된 것으로 판단된다. 월남 선생은 고종의 서명이 없는 조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국권 회복의 단서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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