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산책/수능이 끝난 것이지 공부가 끝난 것은 아니다
■ 고전산책/수능이 끝난 것이지 공부가 끝난 것은 아니다
  • 송우영 시민기자
  • 승인 2017.12.07 23:55
  • 호수 8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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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정休靜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 공부에 관한 잠언이 있다. 절치부심 공부하라.<切心做工夫>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如雞抱卵>,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처럼<如猫捕鼠>, 허기진 자 밥만 생각하는 것처럼<如飢思食>, 목마른 자 물만 생각하는 것처럼<如渴思水>, 아이가 엄마를 찾는 것처럼<如兒憶母>.

공부에 관한한 이보다 더 절절한 말이 또 있을까. 선비는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책을 읽는다. 사흘 굶어 피골이 상접해 당장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아도 우렁차게 부르짖는 구호가 ‘공부를 많이 하면 천하를 다스리고, 공부를 조금 하면 자기 한 몸이 잘 되기를 꾀한다.’ 여기에는 한번 강호에 나오면 몸도 내 것이 아니다.<人在江湖,身不由己>는 수징사상囚徵思想이 배어있다.

남자와 여자는 책 읽는 법이 다르다. 남자는 다스리기 위해서 읽고 여자는 따르기 위해서 읽는다. 조선시대는 그랬다는 말이다. 이를 아정雅正이라 하는데 책을 많이 읽어 기품이 높고 바르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신이 쓴 책이나 서화작품을 남에게 줄 때는 상대를 높이는 표현으로 아정雅正을 쓰고 이에 對句가 아감雅鑑이다. 부족하지만 보아 주십시오 라는 겸양이 배어있다. 물론 혜존이나 사백 이라고도 하는데 혜존惠存이라는 말은 ‘잘 받아 간직해 주십시오’ 의뜻이다.

이런 말들 속에는 나는 책을 읽었습니다. 라는 사회적 인정이 묻어난다. 요즘 세상이야 책 읽는 사람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지만 우리의 선조인 조선시대만 해도 남이 알까봐 몰래 숨겨놓고 책을 읽곤 했다 한다. 왜냐면 책을 읽는다는 소문이 나면 너도 나도 와서 빌려가기 때문에 내 지식을 남에게 도둑맞는 것 같아서 남 몰래 읽었다 한다.

당나라 때 강주자사를 지낸 단성식段成式은 유양酉陽산 토굴에서 아버지 단문창段文昌에게서 문장을 배워 ‘유양산 부뚜막에서 모은 티끌’이라는 뜻의 잡학사전을 썼는데 유양잡조酉陽雜俎라 이름했다. 이 책 모두冒頭에 두 개의 어리석음<二痴>을 말했는데 그 하나가 책을 빌려주는 자는 어리석은 자요<其一痴與>, 그 둘은 빌려간 책을 돌려주는 자는 더 어리석은 자다<其二尤痴還>.

이를 북송 때 관리이며 의원인 방작方勺은 자신의 책 박택편泊宅篇에서 두 개를 더 늘려 사치四痴를 말한다. 책을 빌려주는 것은 어리석음이고<借一痴> 책을 아끼는 것도 어리석음이고<惜之二痴> 책을 찾는 것도 어리석음이고<索三痴> 책을 돌려주는 것도 어리석음이다<還四痴>.

호응린의 제자 방여수는 어리석음을 논하는 글 치론痴論에서 삼치를 말했는데 부모의 어리석음은 자식을 잘못 가르침에 있고<其一父痴非誨>, 자식의 어리석음은 어려서 공부하지 않음에 있고<其二子痴非學>, 이웃의 어리석음은 공부하지 않음을 보고도 지적해 주지 않음에 있다<其三隣痴非指>. 옛 루항陋巷<길거리에 짐들이 많이 쌓여 협착하여 사람들이 다니기가 몹시 불편한 길>의 말에 돈이 많기가 하늘에 닿도록 쌓였어도 죽음은 피할 수 없고<재지앙천종고사財至昻天避毋死>, 가난이 뼈에 사무칠 지경이 되어도 솟아날 구멍은 공부뿐이다<빈한도골치학이貧寒到骨峙學耳>.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부의 말씀은 긴장은 풀지 맙시다. 수능이 끝난 것이지 공부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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