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영의 고전산책
■송우영의 고전산책
  • 시민기자 송우영 기자
  • 승인 2018.01.16 23:35
  • 호수 8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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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으로 써야 할 삶의 무게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전주객사에 걸려 있는 주지번의 글씨 '풍패지관'

송강 정철의 성절사聖節使가 명나라로 향할 때 서장관으로 동행 한 이가 표옹 송영구이다. 일행이 북경 객사에 머무를 때였다. 장작이나 패는 노자奴者가 틈틈이 경서를 외는지라 기특히 여겨 불러 담소와 붓글씨도 써 보이며 물었다.

“드문 일이긴 하나 갈 지之에서 파임을 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지 이럴 때 갈지는 주변 글자보다 조금은 큰 듯 써야 하네. 보아하니. 머슴 같은 데 어찌 경서에 그리 밝으신가?”

젊은이 답하기를,
“머슴 맞습니다. 과거볼 요량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장한지고. 그러나 머슴살이해서 언제 과거 합격하시겠는가. 책과 돈을 줌세.”
“합격으로 보답하겠나이다.”“그런데 붓글씨는 쓰시는가. 좀 전에 갈지 자字 설명할 때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 같기에.”“붓글씨는 돈을 내고 오랜 세월 배워야 하는데 가난하여 예폐禮幣 마련할 돈이 없어서 아직 스승을 모시는 집지執贄의 예禮를 행行하지 못했습니다.”표옹이 말하기를“그 비용도 마련해 줌세. 아마도 10년은 족히 배우셔야 할 걸세.”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1606년 봄. 이 젊은이가 황제의 황장자 탄생을 알리는 외교사절단 (正使)으로 조선 땅을 밟은 중국제일문사中國第一文士 이조시랑 주지번朱之番이다. 그렇게 임금을 찾아뵙고 공무 후 조선 선비 표옹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전주객사에 머물며 갈지之 자字를 써놓고 가는데 13년 전 북경객사에서 머슴노릇 하던 자신을 앉혀놓고 설명하던 그 방식대로 가로 4.6미터 세로 1.8미터 크기로 거침없이 ‘풍패지관豐沛之館’네 글자를 쓴다.<표옹송영구문집疏略構成引用>

역사의 시시비비를 떠나서. 해서楷書십년이라 했다. 붓글씨는 10년은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옛말에 남아팔세불거필男兒八歲不擧筆이면 비연치차우부야非然恥此愚父也라 했다. 자녀가 여덟 살이 되었는데도 붓글씨를 쓸 줄 모른다면 그건 괜찮아가 아니라 부끄러운 일일 터 이니 이는 그 아비의 어리석음이다. 자식이 붓글씨 좀 못 썼기로서니 그걸 갖고 아버지의 어리석음까지 들먹이다니. 대체 붓글씨가 뭐기에... 고래로 붓글씨는 죽기 하루 전까지라도 절대 배워야 할 자기 수신의 第一本이다.

붓글씨 하면 다른 도시에는 한명 있을까 말까는 고사하고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서천에는 명필의 반열에 이른 태산북두와 같은 인물이 장장 삼존좌三尊座에 이르니 한수 이남부터 충청남북도까지의 단아한 선비 서체의 전설적인 필세로 궐헌회여축자필闕軒誨如逐字筆의 비인부전非人不傳 아헌이 적임일 것이고, 강암 이후 호남좌우도를 통털어 붓글씨를 신필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인물은 단연 양수압금풍잠필兩手押噤風簪筆의 거필우전擧筆羽傳 국당菊堂일 것이고, 기라성 같은 전설의 아헌雅軒과 신필의 국당菊堂 사이에서 독보적 운필법으로 우뚝 선 불세출의 좌도반함유수필左道半含流水筆의 명불허전名不虛傳 천산芊山을 비껴갈 수 없다.

이들은 가히 충청내포와 금강 물줄기를 휘감아 도는 서천 땅에 우뚝 솟은 삼대 巨峯이 아닐 수 없다. 붓글씨를 시작한다면 출발을 아헌雅軒으로 둬야 한다. 아헌의 서체에는 조선 임금의 필세부터 조선말 덕혜옹주 서체라 불리는 진흘림에 이르기까지의 폭넓은 서체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사무왕교지의師無往敎之矣라 했다. 배우는 자가 스승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아헌:이정주, 국당:조성주, 천산:최명규<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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