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고향집 풍경
■ 모시장터/고향집 풍경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18.01.24 14:37
  • 호수 8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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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거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나고 자란 내 고향집을 잊을 수 없다. 커서는 정자나무 집으로 이사를 했으나 모든 시의 원천은 내가 태어난 바로 그 곳, 충남 서천군 기산면 산정리 181번지이다.

안방, 윗방 그리고 사랑방이 있었다. 또 하나의 별채가 있었는데 내가 공부하고 미래의 꿈을 키워왔던 곳이다. 거기에는 방 하나, 헛간 그리고 광이 있었다. 아버지는 살림이 어려워 그 집을 통째로 팔았다. 그 집은 내 고모네집이었던 서천군 문산면 등고리에 세워져 있다.

지금 내 고향 본채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내가 집을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아늑한 고향집을 그리며 대신 여기에 ‘초가’란 휘호를 남긴다. (‘절제와 인연의 미학’ 서첩에서)

집 앞엔 돼지 우리가 있었고 옆에는 탱자나무가 있었다. 잿간과 측간이 그 다음이었고 열발짝 떨어진 곳에는 닭장이 있었다.

‘꼬끼오’하고 닭이 제일 먼저 일어나 새벽잠을 깨웠다. 다음엔 꺼먹 돼지가 일어나 밥 달라고 꿀꿀댔고 동이 틀 무렵 참새들은 탱자나무로 우르르 몰려와 먹이를 찾느라 재잘거렸다. 어머니의 인기척에 참새들이 후두둑 날아가면 아침 햇살은 비늘이 되어 우수수 안마당으로 떨어졌다. 어떤 때는 담장에서 작대기만한 큰 구렁이가 마당으로 슬금슬금 기어나오기도 했다.

겨울밤은 길었다. 마당을 질러 측간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밤이면 똥통에 빠질까 등잔등을 들고 갔다. 귀신이 나올까봐 동생과 함께 대동하기도 했다.

“다 누었어?”

“아아니.”

나는 추워서 똥도 잘 나오지 않았고 동생은 추운 측간 밖에서 어둠에 떨고 있었다.

봄이면 옆집 아낙네의 베틀소리가 새벽까지 들려왔고 앞산에선 소쩍새 소리가 하늘 넘어 들려왔다. 뒤꼍 풀밭에선 속독새가 사연 많은 것처럼 잠깐을 짐승처럼 울다 갔다. 감나무 밑으로는 몇 천석 달빛이 쏟아지곤 했다. 천년에 한 번씩 보석 같은 감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당 끝에는 앵두나무가 있었고 깔끄막진 언덕에는 큰 가죽나무가 있었다. 앵두나무는 어찌된 일인지 밑둥치만 남겨진 채 버려져 있었고 가죽나무는 사라호 태풍 때 장꽝을 덮치고는 아버지에 의해 마지막 생을 마감했다. 벼락 맞은 옆가지가 찢긴 닭장 뒤 감나무만이 오래오래 남아 어린 시절 우리의 가을 시장끼를 메워주었다.

동쪽 담 아래에다 나는 새끼줄을 쳐 놓고 봉숭아도 심고 분꽃도 심고 채송화도 심었다. 분홍빛과 하얀 홑봉숭아가 그렇게도 좋았다. 가슴을 오무린 채 부로우치를 달고 가슴 활짝 연 일편단심, 봉숭아가 좋았다. 한낮에는 오무렸다 저녁이면 반달처럼 기도하듯 손모아 편 별빛 같은 분꽃도 좋았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 유난히 검은 눈빛이 빛나는 여동생 같은 붉은 색, 노란색 채송화가 그렇게도 좋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은 절간이었다. 심심해서 꽃나무에 물을 주기도 하고 돼지 등을 긁어주기도 하고 잿간에다 오줌도 싸기도 하고 알을 낳았나 닭 둥지를 떠들어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뒤꼍으로 가 장꽝의 간장, 된장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몇 바퀴 뒤곁을 돌고나면 엊저녁 빗물이 고인 마당가의 절구통을 이리저리 흔들어보기도 했다. 붉은 빗물 속에 비친 어린 내 얼굴은 지금의 자화상처럼 일그러지기도 하고 펴지기도 했다.

밤중이면 이웃집 처자의 베틀 소리가 철컥철컥 새벽까지 들려왔다. 처자는 온 밤을 잉아에 걸고 금강물을 짜아가고 있었고 한 점 새벽 바람은 초저녁 남은 어둠을 뒤늦게 걷어가고 있었다. 움 밖의 기러기 울음은 모시결에 곱게 스며들고 있었고 우주 밖 은색의 별빛은 베틀 위에서 서럽게 감겨지고 있었다. 감나무 잎새 하나가 처자의 앙가슴으로 영원히 떨어지고 있었다.

반세기도 훨씬 넘은 내 가슴 속의 고향 풍경은 이런 것들이었다.

아내에게 고향집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그거 나중엔 애물단지 되어요.”

“당신이 살면 몰라도”

그 집에서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자란 우리는 오랫동안 편리한 도시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아버지가 직접 집을 짓고 그 곳에서 내가 낳고 자랐던 어린 시절 초가집. 혼자 밥하고 혼자 빨래하고 혼자 반찬하고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 거기에서 산다고 하는 나도 사실은 자신이 없다.

등고리로 옮겨진 내가 공부하던 그 사랑채에서 서울에서 고향이 그립다고 혼자 내려온 사촌 형님은 그 방에서 혼자 자다 혼자 죽었다.

어렸을 적 내 고향집은 부엉새가 부엉부엉 울었던 곳이다. 그 울음 하늘을 넘다 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얼었던 곳이다. 하현달이 유난히 높이도 떴던 참으로 높이도 떴던 곳이다.

가슴에나 집을 짓고 살아야겠다. 외로우면 몇 채 더 짓고 살면 되지 않겠는가. 고향집은 내 고향이지 아내의 고향이 아니지 않은가. 낳을 때는 어머니한테 갈 때는 상여한테 실려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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