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넉넉함 전해요
고향의 넉넉함 전해요
  • 최현옥
  • 승인 2003.09.19 00:00
  • 호수 1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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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파란 기를 들고 원을 그리면 안전하므로 출발하라는..."
“시골 어머니의 거친 손길을 뒤로하고 완행열차에 오르는 모습과 플랫폼에 우두커니 앉아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풍경 등 삶의 향수가 배어나는 역은 단순한 교통수단의 장소만은 아닌 것 같아요. 뭐랄까?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끊임없는 삶의 현장. 이런 표현이 맞지 모르지만…”
철도청 공무원으로 30여년 근무해온 서천역 열차운영원 이천원(50)씨. 역의 이미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삶의 현장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역은 단순한 직장의 개념만은 아닌 듯 하다. 그래서 기차를 제어하기 위해 보내는 그의 수신호는 단순한 몸짓이기 보다 삶의 보퉁이를 끌어안은 편지와 같다. 많은 사연들을 전해주고 받아주며 사람들의 가교역할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파란 기를 들고 원을 그리면 안전하므로 출발하라는 뜻이고요. 기를 말아서 들고있으면 선로에 이상이 없으니 들어오라는 것이죠”
그의 수신호에 최고 속도100km로 달리던 거대한 기차가 제어된다는 말에 신호를 부탁하자 자세하게 설명하는 그, 넉넉한 시골 인심이 느껴지는 인상에서 여행객들은 벌써 고향의 품에 안긴 듯한 느낌을 받을 듯하다.
“덜커덩 덜커덩”
그가 수신호를 설명하는 동안 기차가 역에 도착했다. 열차운영원의 작은 실수하나가 큰 사고를 불러올 수 있어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는 이씨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까지 보였던 포근함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빠른 상황판단에 의한 절도와 단호함이 느껴지는 몸 동작만이 있을 뿐이다. 고객의 안전을 위해 무엇보다 직원간의 팀웍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씨. 일 처리의 노련함이 느껴진다.
서행하는 기차를 수신호로 안전하게 보낸 그는 선로 횡단자의 안전을 위해 신속하게 움직인다.
특히 명절이나 휴가철의 경우 갑자기 많은 인파가 쏟아져 나와 통제가 어려워져 자칫 사고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최근 어린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살신성인한 역무원의 보도도 이 같은 경우이고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여행객의 안전에 최선을 다한다”는 이씨는 “아직까지 큰 사고는 없었지만 선로 횡단시 아찔했던 순간이 많았다”며 그때일 만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온다.
항상 무사고를 기원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근무에 임한다는 이씨는 여행객이 편안하게 기차를 이용했다는 말을 들을 때 모든 피로가 풀림을 느낀다.
초등학교 때 기차 여행했던 것이 아직도 머릿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는 이씨. 그의 역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다. 고객에게 역을 휴식의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에 출향인사와 지역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역에 다양한 시설을 갖췄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동안 지루함을 덜기 위해 도서를 열람하고 곳곳에 도자기와 그림을 배치하는가 하면 역에 연중 피어나는 꽃은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또 군과 연계해 특산품을 전시, 지역 경제발전을 위해 홍보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도움을 청해오는 노인을 보면 마치 부모를 보는 듯해 한발 먼저 다가간다”는 이씨. 지역에서 그는 효자로 정평이 나있다. 10여년 전 갑작스럽게 부모님이 중풍으로 쓰러졌고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극정성이다.
“부모님이 아프면서 마음을 비우는 법을 배웠고 남을 배려하며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씨는 음성 꽃동네에 남몰래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
“연휴가 돌아오면 예매를 위해 몇 일 밤을 새고 주민들과 대합실 가득 윷놀이하는 모습 등 풍요로움이 가득했다”는 이씨는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이후 1일 이용객이 2천명에서 1천여명으로 줄어 쓸쓸해지는 역을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다고.
증기기관차에서 디젤로, 디젤에서 경전철로 숨가쁘게 넘어왔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수신호처럼 이씨는 희생정신과 역에 대한 애착은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긴 인터뷰가 끝나자 마자 청록색 꿈을 품은 기차가 덜커덩 덜커덩 소리를 내며 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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