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영의 고전산책
■송우영의 고전산책
  • 송우영 시민기자
  • 승인 2018.02.07 00:30
  • 호수 8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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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뒷골목에서 마주친 10년의 법칙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데<역발산혜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 / 때가 불리하여 오설척추마는 달리지 않는구나<시불이혜추구서時不利兮騶不逝> / 오설척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쩌랴. 어쩌랴<추불서혜가나하騶不逝兮可奈何> / 우야. 우야. 어쩌랴. 이를 어쩌랴<우혜우혜나약하虞兮憂兮奈若何> 

이 시는 항우가 31세 때 오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외쳤다는 오강4언 해하가垓下歌인데 모택동이 15세 때 ‘24사’를 선독先讀으로 읽으면서 차독次讀으로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병행해서 읽던 중 문득 떠올라 항우의 해하가를 써서 벽에 붙여놓고 그 위에 네 글자를 써놨는데 지금까지도 경책으로 회자되고 있는 반면교사反面敎師다.

반면교사란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스승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된 일과 실패를 거울삼아 나의 가르침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24사’와 ‘자치통감’은 모 주석이 죽을 때까지 읽었다는 좌우서左右書인데 이를 다중독법多衆讀法 또는 련주독법聯註讀法이라 하여 여러 권 책을 놓고 관련어를 찾아 변주邊柱를 내고 현토해가면서 읽는 많은 시간투자를 요하는 공부법으로 사대부가에서는 일반화 된 공부법이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할아버지는 화선지를 가로세로 두 뼘. 세 뼘. 크기로 오려서 온 마을을 찾아다니며 천명의 선비들에게 천자문 한 글자당 두 장씩 받아와서 한 장은 모아서 천자문책으로 엮고 또 한 장은 아기의 눈높이에 맞게 벽과 천장에 일주일 간격으로 글자를 바꿔가면서 붙여둔다.

이를 격대교육隔代敎育의 시작이라 하는데 이렇게 3년이 지나 아버지 바짓가랑이를 끌어당길 수 있는 나이인 해제지동孩提之童 3세가 되면 어지간한 천자문이 눈에 익는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대학 책 필사를 한다.

이렇게 공들여 자란 자녀가 5세가 되면 글 읽기를 즐기게 되고 6세가 되면 행동은 세상에 물들지 않게 되고 7세가 되면 앉을자리와 앉아서는 안 되는 자리의 예를 배우고 8세에 이르러 육六절문을 익히게 된다. 그런 연후에 독 대학이다.<竟五歲卽喜讀書 乃六歲卽居止不同流俗 始習禮學男女七歲不同席 至於八歲灑掃應對進退之節文 然後 讀大學也>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가르치는 격대교육 공부법이다. 공부라는 것은 아버지에게는 과거였고 아들에게는 현재이며 손자에겐 미래다. 가문의 흥망성쇠가 공부하나에 달렸다는 말이다.

이렇듯 어려서부터 격대교육으로 품성이 다져진 자녀는 7세부터 17세까지 이르는 폭풍 같은 포호빙하暴虎馮河의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필사해놓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교과서인 대학 책을 읽으면서 천하를 가슴에 품게 된다.

고래로 자녀를 키우는 집안에는 ‘지랄병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우등불가憂登不可의 고2병,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중2병, 혈흠마창泬噾傌猖의 초4병, 그리고 미운 일곱 살이 그것이다.

청춘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이른바 10년의 법칙이다. 7세부터 17세까지 십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결과 뿐 아니라 개인의 결과와 가문의 흥망성쇠는 달라진다. 누구든 이렇게 살고 싶어서 이렇게 사는 사람은 없으리라 아마도 이렇게 살지 않으려고 이렇게 살듯이 공부는 할 수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해야 될 일이니까 하는 거다.

주자朱子 권학문勸學文 왈.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물위금일불학이유래일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금년에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물위금년불학이유래년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잊지마라, 낭비된 청춘의 바닥은 끝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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