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환영의 그림책 이야기 /제10화 - “안방에들 모이면 방 안에서는 새옷 내음새가 나고”
■ 김환영의 그림책 이야기 /제10화 - “안방에들 모이면 방 안에서는 새옷 내음새가 나고”
  • 김환영 시민기자
  • 승인 2018.02.13 00:54
  • 호수 8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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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난골족》(백석 시. 홍성찬 풀어 쓰고 그림. 창비2007)

홍성찬 선생이 여든 가까운 나이에 그려낸
1930년 즈음 우리네 설 풍경

우리나라에 출판문화가 형성되던 1900년대 초, 책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린 이들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었습니다. 그림과 미술비평을 함께 했던 정현웅(1911∼1976)은 출판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는 생활고에 따른 것이었지요. 

당시 예술가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장르를 넘나들며 교우가 깊었습니다. 화가와 문인들은 방을 쪼개 쓰기도 했고,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헛헛한 주머니들을 털어 자주 술자리에 어울렸지요. 일본에 강제 병합된 대한제국은 일본을 통해 신문물을 받아들여야 했고, 예술 부문에서도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근대 예술가들이 생겨납니다. 

당시의 책 장정이나 삽화들을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김기창, 정현웅…. 더러는 월북해 소식이 끊기거나 친일의 오명을 쓰기도 했으며, 제자리를 지키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대개는 자신의 회화적 꿈을 이루기 위해 출판물을 떠났는데, 그러한 1세대 근대 화가들의 뒷자리에 홍성찬(1929~2017)이란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1955년 잡지와 신문을 시작으로 7, 80년대 아동물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출판미술로 일관한 독보적인 화가입니다. 

 

1930년 즈음 우리네 설 풍경을 그리고 있는《여우난골족》(창비2007)은 홍성찬 선생이 여든 가까운 나이에 그려낸, 이르는바 ‘시인들의 시인’인 백석의 ‘여우난곬족’을 원작으로 만든 그림책입니다. 원작 시는 백석 특유의 평안북도의 토박이말로 쓰여 얼핏 못 알아듣기는 하지만 말맛이 감칠맛 나고 정겹습니다. 

1929년생인 홍성찬 선생은 <여우난골족>을 그리기 위해 연변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명절을 쇠며 취재를 합니다. “백석의 고향이었던 평안북도 정주와 정서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연변 산골 마을까지 찾아가서 그곳 사람들과 설을 쇠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북방 풍습과 분위기를 스케치하고 뼈대를 잡았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돌아와서 평안도 실향민들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 21명 모두를 개성 있게 드러내기 위해 손바닥만 한 종이에 각각의 인물들을 의복도 다르게 입히기도 하는 등”(정병규,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웹진 84호) 세밀하게 그림책 구성의 밑그림을 잡아 나갑니다. 

선생의 철저한 고증과 기량을 바탕으로 태어난 그림책《여우난골족》(창비2007)을 보면 나는 무엇보다 백석이 시에서 말한 “새옷 내음새가” 납니다. 나무와 흙을 이겨 지어진 시골집의 냄새도 나는 것도 같습니다. 이는 백석 시의 흥성거림과는 또 다르게 ‘화가가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우난골족 본문 6쪽과 13쪽 
여우난골족 본문 6쪽과 13쪽 

그림은 문자와 달라서, 대상의 전모를 모르면 반드시 얼버무리게 됩니다. 가령 아이들이 “외양간 옆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했다는 “쥐잡이”며 “숨굴막질(숨바꼭질)”, “꼬리잡기” 놀이도, “윗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공기놀이) 하고 쌈방이(주사위) 굴리고 바리깨돌림(놋그릇 뚜껑 돌리기) 하고 호박떼기(편 나눠 서로 떼어내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나란히 마주 앉아 다리 세는 놀이)”도 어떤 놀이인지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없겠지요.  

시에서 “신리(新里)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라 썼다고 해도 ‘이녀’가 계집아이라는 걸 빼곤 어떤 생김새에 어떤 복장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질박한 토박이말로 면면마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묘사하고 있는 ‘신리 고모’와 ‘토산(土山) 고모’, ‘큰골 고모’와 ‘삼촌’을 뺀 나머지 등장인물은 형상에 관한 아무런 정보가 없어요. 결국 이런 부분은 화가의 노력으로 채워지게 되는데, 이러한 부분들이 텍스트 언저리를 짚는 해석들이 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당시의 명절 전의 아침부터 밤까지를, 그리고 설날 아침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올 때까지를 홍성찬의 그림들은 오롯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판물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다방면의 지식과 고증을 요구합니다. 인쇄된 그림이 책으로 묶이는 순간 어떠한 수정도 변명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독자가 어린이나 유아일 경우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세상에 나와 맨 먼저 만나는 그림이 대개는 책을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고증을 통해 그려낸 홍성찬의 그림들은 우리에게 든든한 믿음을 줍니다. 30년 전 제가 출판물에 처음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 때, 참고가 되었던 그림도 오직 선생의 그림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사람들이 무슨 신발을 신고 다니는지 새삼스러웠고 옛사람들의 복장이며 초가와 기와의 구조가 어떤지를 나는 알 수가 없어 난감했습니다. 내 그림만을 그려오던 나는 결국 출판물에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거의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런 제가 고증이 필요할 때마다 뒤적거린 그림이 선생의 그림들이었습니다.

홍성찬 선생에게 바치는 오승민 그림, ‘오늘 피어난 애기똥풀’ 본문그림.
홍성찬 선생에게 바치는 오승민 그림, ‘오늘 피어난 애기똥풀’ 본문그림.

나는 홍성찬의 그림이 회화적이라기보다 건축적이다 싶습니다. 그는 감각적인 것에 휘둘리는 법이 없고 오직 ‘객관 사실’에 근접하기 위해 자료를 뒤지고 발품을 팔아 대상을 최대한 객관 사실에 가깝게 그려냅니다. 그 흔한 과장도 변형도 왜곡도 없습니다. 그는 "아이들에 영합해서 무작정 아이들의 세계가 순수하다느니, 무조건 우리 것이 좋다느니 하는 발상의 책은 반대"라며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려는 어른의 노력이 아이들에게 정확히 전달되는 책, 거짓말하지 않으려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역설합니다. 선생의 그림은 그리하여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사실대로 그리기’, ‘사실적 엄격함’이야말로 오늘날의 선생을 만들었다 싶습니다. 그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한국의 전통문화를 눈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실력자였습니다.  

우리가 18세기 조선의 모습을 본 것처럼 떠올릴 수 있는 까닭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선생이 작년 말에 돌아가시고, 이제 우리의 근대를 실감나는 기억 속에서 속속들이 재현해 낼 수 있는 화가는 없습니다. 여든넷에 만들어진 마지막 그림책인《토끼의 재판》(2012)까지 자신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온 홍성찬은 한국 책 그림과 그림책의  역사歷史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우난골족》을 보다 보면 나는, 오래전 서울역에서 장항선을 타고 삽교역에서 내리면 몇 시간 전부터 자전거를 끌고 역에 나와 계시던 큰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만나자마자 거친 손들을 붙잡은 채 한동안 안부를 묻고, 오랜만에 기름진 안주로 늦도록 술잔이 돌며 이야기를 나누다 설날 아침, 방안에 고여 있는 퀘퀘한 흙집 냄새 사이로 잠자는 방까지 흘러들어오던 음식냄새, 늦잠 자는 우리를 깨우던 아버지의 쉰 목소리, 그리고 두꺼운 솜이불 속으로 들이치던 찬 공기와 설날 아침의 참새소리와 실골목마다 넘쳐나던 아이들 노는 소리도 들리는 듯합니다. 이제는 모두 돌아가셨지만, 아침 일찍 차례를 모시고 충청도식의 동글동글한 떡국을 한 그릇씩 먹고 나면 카랑카랑한 겨울바람을 쐬면서 가까이 사는 일가 어른들에게 세배 드리러 다니곤 하던 기억도 새록새록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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