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잎새달
■모시장터/잎새달
  • 칼럼위원 박자양
  • 승인 2018.04.11 15:13
  • 호수 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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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월의 어느 이른 아침, 동편 산마루를 넘어 오르진 않았지만 숨은 해에서 뻗어 나와 천지에 퍼진 빛만으로도 산자락은 훤히 밝다. 매년 이맘때 새벽이면 새싹들이 움트는 소리가 들릴 만큼 집밖은 살아 숨 쉬는 이들의 움직임으로 부산하다. 밤새 아니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이른 시각부터 먹이 활동에 여념없는 한 줌도 안 되는 작은 멧새들, 제 영역 지키느라 정신없이 돌아치는 딱새 수컷의 울음소리, 날카로운 모과나무가지에 작년에 마련해 둔 개구리포를 아직도 비상식량으로 여기는 때까치의 짱짱한 울림, 이 모두가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아침을 여는 경쾌하고 소란스런 몸짓이다.

이어 우수가 지나고 땅이 풀리더니 경칩도 되기 전에 뾰족이 마늘싹이 올라오고 어린 양파 잎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을 뒷산 숲바닥에선 복수초와 노루귀가 귀한 꽃을 피우고, 마당 여기저기에도 어린잎과 새싹들이 풀린 땅을 뚫고 올라오느라 땅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참으로 기특하다. 앞마당 끝자락엔 절로 자라나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있는 산뽕나무와 느릅나무에 새벽 일찍이 오색딱따구리가 찾아오면 가지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이다. 대강 달포 전부터 시작됐다. 일본의 어느 수의사는 찾아드는 새들을 보고 싶어 고로쇠나무줄기에 부러 생채기를 내고 기다리기도 했다던가. 인간의 욕심이다. 인간의 개입이 없어도 나무는 줄 수 있는 만큼 주고 새들 역시 그것으로 만족하며 알아서 이들을 찾는다. 나무에 물이 올라 온 몸에 고루 퍼지면 먼 길 찾아온 청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맑은 소리가 이른 봄 새벽 공기를 깨우고 산기슭에선 경칩도 전에 잠을 깬 산개구리가 목청을 가다듬어 화답한다.

이렇게 봄은 왔다.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청명(淸明)절과 봄비가 내려 온 세상 곡물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가 든 4월, 잎새달이다. 잔인한 계절이라는 어느 서양 문인의 말과는 사뭇 다르게 만물에 생기가 깃들고 들생명들의 삶이 궁금해 설레기까지 한다.

청명과 비슷한 시기엔 늘 한식이 자리한다. 지금은 다소 잊힌 오래 전 풍습이지만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새 기운을 머금은 불씨를 받고자 잠시 차갑고 서늘한 음식과 생활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던 그런 시간이다. 더불어 조상을 모신 산천을 돌보는 일도 이 때 이루어진다. 봄기운을 잔뜩 머금은 머위와 두릅 등과 미리 마련해 둔 육포를 챙겨들고 때맞추어 성묘 길을 서둘러 나선다.
저승만큼 먼 길이나 차창을 스치는 초록들 덕분에 곤함이 가신다. 반나절을 달려 도착해 산소를 둘러보고 챙겨온 음식을 차린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이다 보니 더욱 허망하기 그지없다. 고수레한 음식 조각들을 주변을 맴돌던 큰부리까마귀 한 쌍이 냉큼 물어간다. 먹이를 물고 날아가는 큰부리까마귀의 뒤를 쫓던 까치가 혼쭐이 난다. 멀리 나뭇가지 위에서 어치 한 쌍이 이를 지켜본다. 누구라도 먹을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

이러거나 말거나 박새 수컷 한 마리는 산소 바로 옆 산목련나무가지 사이에서 연신 경고음을 내며 제 영역이라 여기는지 들어선 인간을 내키지 않아 한다. 이 녀석과는 달리 떼로 몰려다니는 쑥새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속이 좋아 보이기까지 하다. 각종 산새들도 오가고 온갖 봄꽃과 초록이 앞 다투어 깨어나 눈이 부신다. 이리 좋은 환경이면 편안하시리라. 자연에 기대어 헛헛한 마음을 다잡아본다. 조상 위한답시고 오며가며 한껏 위로 받은 건 그러고 보니 나 스스로다. 가신 후에도 음으로 양으로 자식을 염려하는 부모님의 마음이려니. 귀갓길엔 봄비도 내리고 덕분에 들뜬 마음이 절로 차분해진다. 집에 돌아와 마당턱에 걸터앉아 한 숨 돌리며 발치를 내려다보니 토종민들레 흰 꽃이 언제 올라왔는지 따뜻한 마음을 건넨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꽉 차 오르는 잎새달의 풍경이다.

예로부터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는 바닷가 마을에선 청명에 날씨가 좋아야 조업도 잘되고 밭작물도 풍작이 들 것으로 여겼다 한다. 또 며칠 후면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북상해 충남의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까지 올라온다는 곡우절이다. 이 시기에 전남 영광에서는 한식이나 입하사리 때보다 곡우사리 때에 잡히는 조기가 알이 많이 들고 맛도 좋다하여 곡우사리 조기를 가장 으뜸으로 여긴다니 바야흐로 서해안에 생기가 도는 시절이다. 잎새달을 성묘로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곡우절 즈음해서 바닷가 순례를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 곡우가 지나야 조기가 운다 하니 잎새달 끝물쯤이면 조기울음을 벗 삼아 바닷가 산책을 할 수도 있으리라.

더불어 운이 좋으면 성격이 급해 일찍부터 개펄을 훑어 먹으러 올라온 숭어들의 뻐끔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가까운 야생차밭을 찾아 이제 막 피어난 찻잎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고, 그 밭 사이에 서있는 매화나무의 이미 져버린 꽃잎을 밟으며 군데군데 조용히 피어난 진달래꽃과 눈을 맞춰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혹은 때맞춰 우전을 준비하는 바쁜 명인의 일손을 거들고 차 한 잔 얻어 마시는 행운도 따를지 모른다. 산이든 들이든 바다든 싱그러운 봄이 온전히 깃드는 잎새달이다.

2박3일 내린 봄비 덕분에 서둘러 펴버린 봄꽃이 한 순간 꿈처럼 사그라지더니 때 늦게 찾아 든 꽃샘추위가 새벽기운을 쨍허니 뒤바꿔버렸다. 春雨暗西池(봄비가 자욱이 연못에 내리니), 經寒襲羅幕(쌀쌀한 추위가 장막으로 스며오네). 閒住瑤池吸彩霞(한가히 요지에 살며 붉은 노을에 취하니), 瑞風折吹碧桃花(바람이 벽도화 가지를 불어 꺾누나). 조선 중기 허난설헌의 ‘춘우(春雨)’와 ‘유선사(遊仙詞)’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봄 날씨가 이리도 변덕스럽다 보니 이를 빗대어 옛사람들은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변덕을 부린다 한들 자연이 운항하는 절기의 힘을 넘어설 순 없다. 온기는 다시 찾아들 터이고 차례를 기다리는 꽃은 지천이다. 기다려 바라보고 알아봐주고 그리고 반겨줄 일만 남았다. 잎새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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