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 산책-태산에 부딪혀 넘어지는 사람은 없다 
■ 송우영의 고전 산책-태산에 부딪혀 넘어지는 사람은 없다 
  • 송우영 시민기자
  • 승인 2018.05.02 17:18
  • 호수 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계강자季康子의 가家는 춘추시대 노나라 벌문閥門으로 부자인 권문세도가이다. 논어에 계씨季氏편이 편명될 정도로 막강하다. 안연顔淵편에서 계강자가 공자께 정치政治를 묻는데<계강자문어공자季康子問政於孔子> 공자는 정치란 바른 것이다<孔子對曰 政者正也>라고 답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政은 곧 正이라는 공자의 답이다. 쉽게 말해서 政과 正은 같다는 말인데 허신의 설문해자는 정正과 정征과 정政의 절운切韻은 지성절之盛切로 같다고 했고 조선사대부가의 한문비급서인 규장전운奎章全韻에 의하면 정正과 정征과 정政의 압운押韻은 경운敬韻이며 성조聲調는 거성去聲이라고 밝히고 있다.

맹자는 바를정正도 정사정政도 아닌 칠정征으로 정치政治를 논변한다. 맹자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4-2문장에서 정치<征>란 말言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정지위언정야征之爲言正也>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제나라 직하궁에서 순자로부터 글을 배운 한비자는 맹자의 정치<征>란 말言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정언征言에서 유세의 어려움을 논한 세난說難편을 쓰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거꾸로 박힌 비늘이라는 뜻의 역린逆鱗이 나온다. 용이라는 동물은<부룡지위충야夫龍之爲蟲也> 유하게 길들이면 타고 다닐 수 있지만<유가압이기야柔可狎而騎也> 그러나 그 목구멍 아래에 한 자쯤 되는 거꾸로 박힌 비늘이 있는데<연기후하유역린경척然其喉下有逆鱗徑尺> 만약에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약인유영지자즉필살인若人有嬰之者則必殺人>임금에게도 그러한 역린이 있으니<인주역유역린人主亦有逆鱗> 말하는 자가 그 임금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설득은 가능하다<세자능무영인주지역린즉기의說者能無嬰人主之逆鱗則幾矣. 韓非子說難.史記老子韓非列傳>
그러므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역린을 건드리지 않고 말로써 상대방을 설복說伏시키는 행위이다. 여기에는 하수下手의 정치와 성인聖人의 정치가 있다. 성인聖人의 정치는 민생에 집중하지만 하수下手의 정치는 상대방 비난에 집중한다. 하수의 ‘야매<뒷거래를 뜻하는 일본어 ‘야미’의 오기> 정치꾼’들은 퇴출되어야 마땅하다. 저들은 앞에서는 국민을 위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뒤로는 자신의 탐욕만 채우기 때문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을 했던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통해서 인간의 탐욕을 비웃으며 왈. “지독하다 지독해. 지상에 사는 인간의 한심한 꼴을 보라지.”

그렇다면 성인의 정치란 뭘까. 순망이 말한다<순망왈諄芒曰> 성인의 정치란<성치호聖治乎> 관직을 설치하되 마땅히 옳음을 잃지 않으며<관시이불실기의官施而不失其宜>, 인재를 발탁하되 능력 있는 자를 잃지 않으며<발거이불실기능拔舉而不失其能>, 신하들의 사정을 살펴 그들이 할 바를 하도록 하면<필견기정사이행기소위畢見其情事而行其所為> 신하들의 행동과 말은 스스로 천하에 교화가 되나니<행언자위이천하화行言自為而天下化> 이쯤 되면 손가락만 까닥이고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만으로도<수요고지手撓顧指> 사방의 백성에게 다스림의 덕이 이르지 않음이 없나니<사방지민막불구지四方之民莫不俱至> 이것이 성인의 정치다<차지위성치此之謂聖治. 莊子外篇12篇天地12章>

일찍이 한비자韓非子는 간겁시신姦劫弑臣에서 이르기를, 눈에만 의지해서 밝히고자 하면<대목이위명待目以爲明> 보는 것은 적다<소견자소의所見者少矣>. 곧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전체를 봐야 한다는 말로 나무보다 숲을 보고 겉보다 속을 보라는 경계警戒의 잠箴이다. 여기서 나온 격언이 ‘물은 건너봐야 깊이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됨됨이를 안다.’는 이언俚諺이다. 그렇다면 계강자의 정치나<政> 공자의 정치나<正> 맹자의 정치나<征> 한비자가 말한 역린의 설<逆鱗之說>이나 순망諄芒의 성인의 정치<聖治乎>, 이 모든 것 이면에는 지知가 있다. 지知의 출발은 학學. 즉 배움에서 비롯된다. 주자가 말한다<주자왈朱子曰>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물위금일불학이유내일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금년에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물위금년불학이유내년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明心寶鑑勸學篇)
태공망 여상은 한술 더 떠서 말한다<태공왈太公曰>. 사람으로 태어나 인생을 살면서 배우지 않으면<인생불학人生不學> 어둡고 캄캄한 밤길을 걷게 된다<여명명야행如冥冥夜行>. 여기서 ‘如’는 같다의 의미가 아니라 ‘이다’라는 확정형종결조사로 읽어야 한다. 천하의 성인 공자는 아들에게 일생에 걸쳐 딱 두 개를 가르쳤다. 첫째가 “詩를 배웠느냐”이고, 둘째가 “예禮를 배웠느냐”이다<論語季氏篇> 시詩는 예禮의 각주다. 세상에는 무례의 값이라 는 것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예의없는 것들에 대한 대가는 혹독한 법이다. 태산에 부딪혀 넘어지는 사람은 없다<인부도어산이도어석人不倒於山而倒於石>.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작은 흙무더기이다<인함부지어산이지어질人咸不躓於山而躓於垤>. 한비자의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