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영의 고전산책
■송우영의 고전산책
  • 송우영 시민기자
  • 승인 2018.05.10 10:49
  • 호수 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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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내게 일어난 일과 내가 행한 일로 평가된다. 

조선시대에서 문장 끊어 읽기는 자칫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에 비견되곤 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論語’ 향당편鄕黨篇에 나오는 구분廐焚. “자퇴조왈子退朝曰, 상인호傷人乎, 불문마不問馬”이다. “공자께서 조정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야 마구간에 불이 났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공자는 ‘사람이 다쳤는가?’ 라고만 물으시고는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가 종래의 해석으로 사람을 존귀하게 여긴 공자의 인품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이후로는 불문마不問馬는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사람보다 앞 설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통용된다.

그런데 ‘상인호傷人乎 불문마不問馬’는 방점을 달리 찍으면 의미가 달라진다. 곧 '상인호불傷人乎不‘에서 방점을 찍고 ’문마問馬‘라고 읽으면 ‘사람이 다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어본 뒤에 ‘말에 대해 물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한다고 해서 말보다 사람의 안위를 우선함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이 문장은 논어論語위정편爲政篇2-16文章 “자왈子曰 공호이단攻乎異端 사해야이斯害也已”와 더불어 꽤 긴 시간 ‘부扶 안설安說’까지 들먹이며 설명을 해야하는 부분임에 분명하나 할애된 지면 관계로 뭉뚱그릴 수밖에 없음에 읽는 자의 금도襟度를 기대한다.

경전經典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문자무오설文字無汚說에서 오는 축자역逐字譯이다. 이는 한국기독교회에서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조직신학이 됐건 주경신학이 됐건 주해 설교든 강해 설교든 이를 근간으로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18세까지 四書를 모두 외웠던 일립 강태국박사의 사복음서 연구, 19세까지 四書三經을 모두 외웠던 정암 박윤선 박사의 어마어마한 거질巨帙의 성경주석 등이 모두 주자 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의 경전해석법을 따랐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본래 경전의 전통적 해석법에는 불가역적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던 교조적 사대부 사회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더러 있는데 ‘불가불가不可不可냐 불가불不可不 가可’냐 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쉽게 말해서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 앉을 수 있느냐’라는 물음처럼 난감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조선시대 발군의 한 선비의 죽음이 있다. 우암의 30년 지기 백호 윤휴는 경전해석법에 있어서 주자의 전통적 해석방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경신환국 때 “말해야 할 것은 말하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언기소가언言其所可言불언기소불가언不言其所不可言>(윤휴백호전서白湖全書白湖集卷二十三.雜著.言說)는 말을 남기고 사약賜藥을 받는다.

이 죽음의 표면적 이유는 사문난적이라는 뚜렷한 명제가 있지만 이면에는 어려서 만난 사람이 10년 후 자신의 년봉이 된다는 청소년 학습법이 내재되어있음을 읽어내야 한다. 논어 위정편 지우학志于學의 나이 15세에 누구에게 어떤 공부를 하느냐에 따라서 10년 후 20-25세 즈음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 된다는 말이다. 천자문 예악禮樂편 82문장에는 음악에도 신분이 있으며<樂殊貴賤> 사람에 따라서 禮가 다르다고 말한다<禮別尊卑>. 삶이란 내게 일어난 일. 지성知性과 내가 행한 일, 품격品格으로 평가된다. 이는 퇴계 이황의 학습법으로 통하는 조선시대 자녀들의 공부법이기도 하다. 지성과 품격이 결여된 공부는 경멸의 대상이 될 뿐이다. 지성이 모자라는데 예능까지 넘친다면<才勝德薄> 품격 없는 막말이 난무하게 되고 분노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공부에 너그러워 하고 싶은 공부만 그것도 적당히 잘하는 탈학적脫學的 자폐증은 ‘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라며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에 빠져 언젠가는 자신을 매몰비용 속으로 함몰시킨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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