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지지대
■모시장터/지지대
  • 칼럼위원 박자양
  • 승인 2018.06.07 18:27
  • 호수 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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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른 봄이면 습관처럼 손바닥만 한 마당에 마련한 텃밭을 일굴 준비를 한다. 땅을 뒤집어 고르고 밑거름을 넣는 일이 그것이다. 갓 넣은 퇴비에서 퍼져 나오는 쿰쿰한 냄새가 슬슬 사라지면 절기를 따라 이것저것 파종도 하고 모종을 키워 옮겨심기도 한다. 부지런한 이웃들은 항상 한 발 앞서 모든 일을 끝내지만, 여유로 포장한 게으름이 뼈 속 깊숙이 찌들은 나는 뒤밟듯 두어 박자 늦게 일들을 한다.

그래도 그런 게으름에 그럴싸한 명분을 적잖이 제공해주는 무척 고마운 푸성귀들이 있다. 마당 구석구석 틈만 있으면 얼굴을 내미는 쑥은 말 할 것도 없고, 이른 봄부터 따로 신경 써 자리를 마련하고 땅을 갈아엎지 않아도 때 되면 알아서 스스로 싹 틔우고 자라주는 레드치커리는 가을엔 예쁜 보랏빛 꽃을 피워내어 눈요기까지 선사한다. 수로 건너편 둔덕에는 두릅이랑 참취랑 머위가 자생하듯 자라나 봄철 밥상을 고급지게 해주고, 초여름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 맘 때면 제법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왕고들빼기는 제법 쌉쌀한 맛이 일품으로 반갑기 그지없다. 뽀얀 토종민들레를 도와준답시고 잡초로 치부되어 매번 뽑혀나가기 일쑤인 노란 서양민들레와 처음 나온 덩굴손이 여리여리한 사위질빵은 다른 봄나물에 밀려 미처 밥상에 오를 새가 없다. 또 조금만 몸을 움직여 산뽕나무의 빽빽한 가지를 솎아주면 보상처럼 새로 나온 어린잎을 얻어 귀한 맛을 즐길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말이 좋아 자연농법이지 실상은 자연에게서 일방적으로 얻어 사는 신세다. 그래도 공을 들여야 얻어지는 열매들은 어쩔 수 없이 모종을 미리 기르거나 장날 구해다 정식을 해야 한다. 오이, 가지, 고추, 토마토 등이 그들이다. 어느 정도 무게가 있는 열매를 열거나 덩굴손을 뻗어 줄기를 올리는 식물들은 모종을 정식할 때 지지대를 세워준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마당에 나설 땐 언제나 대동하는 작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풍악을 곁들이며 나의 텃밭은 좀 색다른 여유를 갖는다.

대개는 모종을 정식할 때 지지대를 같이 설치하지만, 여기선 어린 모종들이 좀 더 자유롭게 자라도록 내버려둔다. 더 이상 방치하면 덩굴손을 내어 다른 줄기가 갈피를 못 잡고 헤매기 시작하거나 키가 너무 자라나 휘청거리기 시작할 즈음 주변자리를 골라 지지대를 세운다. 그리고 나면 여린 생명들이 곁에 세워준 대나무에 기대어 편안한 숨고르기를 시작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라디오에선 갖가지 음악과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생명들마다 각기 좋아하는 곡조가 퍼질 때면 그 몸짓이 달라진다.

음악방송이 끝나고 정시가 되자 뉴스가 이어진다. 온통 정치와 지방선거 이야기 일색인 중에 짬짬이 끼어드는 물가와 경제, 사건‧사고들에 관한 보도들로 5분 시간은 메워지고 일기 예보인지 실시간 중계인지로 뉴스는 마감된다. 지난겨울 엄동설한에 불거져 나온 미투운동의 진행상황에 관한 보도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경주하듯 쏟아져 나왔던, 어느 것 하나 진솔한 내용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던 논평이며 사설들 역시 종적을 감췄다. 반인륜적 범죄의 실상은 제쳐두고 용어의 정의나 경계가 불분명 하다는 둥, 검증이 용이치 않다는 둥 지시적 변명과 말장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세운 지지대에 어린 모종들의 줄기를 조심스레 묶어주며 다행히 5분이 쏜살같이 지나고 다시 음악방송으로 이어졌다. 밥말리(Bob Marley)의 "no woman no cry"(울지 말아요, 여인이여)가 흐른다. 식민압제에 시달리던 조국과 국민을 여인에 빗대어 다독이며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의 절절한 심경을 담아 그들만의 곡조와 리듬으로 풀어낸 명곡이다. 자마이카를 식민통치하던 백인들의 비위나 맞추며 자신만의 성공을 위해 쓸개를 상실한 이들 위로 안 모 전검사장이 겹쳐지고, 자유를 위한 투쟁에 소중한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은 이들 위로 성범죄 희생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자리를 잡는다. 정식한 후 온갖 해충에 뜯기고 먹혀 만신창이가 됐어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티며 자라준 기특한 백오이는 기울어진 줄기를 곧추세워 대나무지지대에 묶어주니 편안한 지 잠든 척을 하다 이어지는 레게리듬에 맞춰 흔들흔들 신이 났고, 곁을 지키던 찰토마토는 짐짓 드레진 척을 한다. 지금이라도 지지대를 세워주어야 한다. 그들의 희생된 삶에 점철된 피멍이 빠지고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시각도 어느 곳에서 자행되고 있을지 모를 파렴치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모두가 마음을 내어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 주어야 한다. 이런 천박한 행동양태가 인간의 종특이성으로 자리를 굳히기 전에 서둘러 정신들 차려야 하지 않을까.
 

지지대는 어린 생명들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나 그것만으로 그쳐선 제대로 된 결실을 얻기란 쉽지 않다. 틈틈이 돌보는 정성과 관심이 간단없이 이어져야 한다, 순리로 생이 다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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