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포구로 이어지는 중고제 판소리
■특집/포구로 이어지는 중고제 판소리
  • 뉴스서천
  • 승인 2018.07.11 17:12
  • 호수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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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하류 번성했던 강경포구, 중고제 판소리 산실

김정근-김창룡·이동백으로 이어지며 서천에서 성장
​​​​​​​▲강경읍 옥녀봉 서편 기슭에 있는 중고제 판소리 창시자 김성옥의 생가지를 찾은 장항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탐방팀
▲강경읍 옥녀봉 서편 기슭에 있는 중고제 판소리 창시자 김성옥의 생가지를 찾은 장항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탐방팀

서천의 뱃길과 포구라는 주제로 길 위의 인문학강좌 및 탐방을 진행하고 있는 장항공공도서관(관장 최용관)은 지난 7일 금강 뱃길의 중심이었던 강경포구와 공주 지역을 탐방하며 중고제 판소리의 탄생과 중고제 판소리 문화를 꽃피웠던 현장을 살펴보았다.

뉴스서천은 주민 20여명과 함께 동행하며 중고제 판소리를 처음 완성시킨 강경의 김성옥 생가지와 서천이 낳은 명창 이동백, 김창룡이 활동했던 공주에서 이동백 명창이 거주했던 곳을 둘러보았다.

중고제 판소리의 산실 강경 포구

▲김성옥 생가지에서 내려다 본 옛 강경 포구
▲김성옥 생가지에서 내려다 본 옛 강경 포구

고대로부터 물자가 이동하던 주된 통로였던 서해와 금강의 뱃길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상업이 발전하면서 경제적 번성의 토대가 되었으며, 문화의 탄생지이자 이동통로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평양, 대구와 더불어 3대 경강으로 불렸던 강경(충남 논산시)은 해양문명과 내륙문명이 만나는 접점이었으며 군산선 철도가 놓이고 나서도 번성을 누렸다.

논산 출신으로 중고제 판소리의 맥을 잇고 잇는 박성환 명창(시초면 거주)의 안내로 강경 옥녀봉 서쪽 산 중턱에 있는 중고제 판소리의 창시자 김성옥 생가터를 둘러보았다.

논산천과 강경천이 금강 본류로 흘러드는 즐펀한 곳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옥녀봉이다. 높이는 비록 43m밖에 되지 않지만 정상에 오르면 동쪽으로 멀리 황산벌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서해를 향해 달리는 금강의 모습이 장쾌하다.

강경포에 강경장이 서면 금강 하류에서 해산물을 가득 실은 돛단배와 여러 지방의 특산물을 실은 무역선들이 몰려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들도 곧바로 들어와 뱃사람들과 장사꾼, 구매자들과 약장수들로 시끌벅적 했고 술집마다 노래 소리가 대낮부터 끊이지 않았다 한다.

강경포구의 중심은 바로 옥녀봉 아래 금강변이었다. 수백척의 배들이 옥녀봉 기슭에 늘어섰고 이를 훤히 내려보는 옥녀봉 서편 중턱에 김성옥의 생가터가 있다. 박성환 명창은 옥녀봉 새편(서편) 기슭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며 김성옥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중고제의 시조로 추앙받는 김성옥(1801~1834)은 논산시 강경읍 일끝리 태생이다. 그는 논산을 중심으로 한 금강유역 일대에서 중고제를 발전시켰으며 또한 판소리 전체를 보더라도 성악계의 일대 신발견인 진양조를 창시해 당시 판소리계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켰다.

또한 강경에서 인접한 웅포에 살던 송흥록과 처남 매부 지간으로 서로 교류를 통해 송흥록의 동편제 창시에 음악적인 토대가 되어 주었다. 동편제는 서편제로 진화 발전했다.

또한 이곳 강경에서 태어난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은 아버지 김성옥으로부터 이어받은 중고제를 더욱 발전시켜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장항 성주리로 이거해 아들 김창룡과 종천면 도만리 출신의 이동백을 가르쳤다.

이처럼 강경이 중고제 판소리의 태생지라면 장항은 이를 키운 곳이다. 김성옥에 의해 창안돼 판소리계의 혁신을 불러일으켰던 중고제는 재담소리 위주에서 서정성의 확보 재미와 감동의 예술로 승화 판소리 중요 대목의 음악적 표현의 확장 등을 특징으로 근대 판소리의 출발점이 되었다.

박성환 명창은 당시 판소리는 요즘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케이 팝이상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장르였다고 말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었고 위로는 국왕에 이르기까지 판소리를 좋아했다. 이동백은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고종으로부터 정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받기도 했다.

중고제 판소리의 대소비지 공주

▲공주시 옥룡동에 있는 이동백 명창 거주지. 1950년대에 집을 다시 지었다 한다.
▲공주시 옥룡동에 있는 이동백 명창 거주지. 1950년대에 집을 다시 지었다 한다.

공주에서는 공주의 소리꾼 이걸재씨의 안내를 받았다. 그는 공주시청 공무원으로 31년을 일했으며 석장리박물관 박물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공무원 재직시절 우리 전통 소리가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해 이를 찾아다니며 채록을 하고 이의 보존에 열정을 쏟아왔다. 최근에도 예산에서 장터풍장패를 발견하고 이들의 가락을 보존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그는 공주는 당시 충청권의 가장 큰 도시로 판소리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이 산실이자 대소비지였다고 설명했다.

이에는 공주 갑부 김갑순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그는 친일을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문화예술 분야에서 공도 있다는 이걸재씨의 설명이다.

▲공주시 공산성 안에 있는 김갑순의 세 번째 부인이 살던 집. 예전에는 공산성 안에 장이 섰었다.▲공산성 안 김갑순이 살던 집터에서 탐방 일행에게 공주 갑부 김갑순이 문화예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걸재씨
▲공주시 공산성 안에 있는 김갑순의 세 번째 부인이 살던 집. 예전에는 공산성 안에 장이 섰었다.▲공산성 안 김갑순이 살던 집터에서 탐방 일행에게 공주 갑부 김갑순이 문화예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걸재씨

2만석 부자인 김갑순은 판소리를 좋아했으며 소리꾼들이나 다른 예술인들에게도 두둑히 공연비를 지불해 그의 집에는 문화 예술인들의 출입이 그칠 날이 없었다 한다.

서천이 낳은 명창 이동백과 김창룡은 1930년대 한때 공주에서 활동했는데 이씨는 생전의 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증언을 듣고 이동백이 거주했던 곳을 알아냈다. 장항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탐방 일행은 이씨의 안내를 받아 공주시 옥룡동 산29-1에 있는 이동백 명창의 거주지를 살펴보았다.

탐방 일행은 다시 서천으로 돌아와 종천면 도만리에 있는 이동백의 생가터와 그가 득음을 했던 희리산 용굴을 답사했다.

▲이동백이 득음을 했던 희리산 용굴 앞에서 박성환 명창이 이동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이동백이 득음을 했던 희리산 용굴 앞에서 박성환 명창이 이동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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