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을 아시나요?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을 아시나요?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8.07.18 22:12
  • 호수 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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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판교 고석주 선생 공원에서 흉상 제막식
▲고석주 선생과 부인 나운금 여사
▲고석주 선생과 부인 나운금 여사

19일 오전 11시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의 흉상 제막식이 고석주 선생 공원(판교면 현암리 216-2)에서 열린다.

군산 3.5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인 고석주(高錫柱, 1864.10.23-1937.7.19) 선생은 192910월에는 판교교회 설립에 참여했고 193010월 서천군 동면(현 판교면) 판교리 473-2번지로 호적을 옮겼다.

판교에서 교회 중심의 사역과 계몽운동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했고, 야학활동과 청년회 등을 조직해 민족의식을 키우는 활동을 전개하다 1937719일 소천해 판교면 북대리 산27번지에 안장됐다.

고석주 선생의 독립운동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3125일 하와이에 홀로 도착한 선생은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등과 같이 하와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하와이에서 자강회, 협성회, 국민회 등의 조직에 관여했고 기관지인 자강회 월보와 신한국보 등 신문의 집필활동을 하는 등 고석주 선생의 행적은 실로 폭넓었다.

19166월 하순 하와이를 떠나 귀국 후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해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한 김인전 선생의 한영학교 학생들 일부가 군산 영명학교로 전학했다.

고석주 선생이 55세이던 19193.5독립만세운동 당시 상황에 대해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공훈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19년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이 해 31일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가 동료 교원에게 전해지면서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기도 하고, 각 방면으로 연락해 군산(群山) 장날인 36일에 거사하기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거사 전날 이 운동계획이 발각되어 주동교사들이 연행됨으로써 35일 군산에서 학생과 주민, 예수교 신도 등 500여명과 함께 시내를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학생들에 의하여 태극기가 나누어지고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한편 군중의 일부는 경찰서로 달려가서 구속된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 군경은 주동인물들의 검속과 군중해산에 주력해 영명학교 및 예배당을 수식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 영명학교에서 선언서 200여장이 발견됨에 따라 송정헌(宋正憲), 양성도(梁成道) 등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해 3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4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6월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6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선생은 군산구암교회 장로에 임직되어 활동하다 1930년에 서천 판교를 근거지로 애국계몽운동과 민족운동 고취에 진력했던 것이다.

그동안 판교면 주민자치위원회와 서천군, 서천문화원, 고석주선생기념사업추진위원회 등이 적극 나서 묘지 정비를 비롯한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했고, 마침내 국가보훈처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지난해 112일 오전 6시 파묘 후 화장을 거쳐 오전 11시 충남 서천군 소재 판교교회 대예배실에서 안장 추념식을 갖고 이날 오후 3시경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옮겨 안장했다.

판교면 주민자치위원회와 서천군은 활동기록을 더 보강해 보다 활발한 선양운동을 할 계획이다.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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