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수탉의 비애
■ 모시장터/수탉의 비애
  • 최용혁 칼럼위원
  • 승인 2018.08.01 13:10
  • 호수 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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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칼럼위원

사람도 나자빠지는 더위다. 계란은 둘째 치고 닭들이 살아 있기만 해도 감사하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차지만 늘 하던 일을 꾸역꾸역 해 낸다. 먹고, 울고, 싸고, 싸우고, 사랑한다. 그렇게 생사를 오락가락할 만한 일상이지만 구경꾼들이 보는 것은 좀 다르다. 특히 나와 비슷한 40대 이상의 중년 남성들은 공통적으로 궁금해 하는 것이 있다. 가축치고는 제법 놀고 있는 닭들을 보면서 점잖은 체하며 처음으로 묻는 질문은 한 마리의 수탉이 몇 마리의 암탉과 짝을 이루냐는 것이다.

유정란을 생산할 때의 적당한 비율은 115 안팎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경제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 지켜야 하는 닭장 안의 평화를 유지하는 비율이다. 알은 암탉이 낳지만 수탉은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문제를 일으킨다. 있긴 있어야 하되 눈치껏 적당히 있어야 한다. 닭들에게는 일상적인 생태일 뿐이지만, 115라는 비율에서 이 중년의 남성들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읽어 내거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나보다. 지금보다 열다섯 배의 돈과 열다섯 배의 집과 열다섯 배의 쾌락을 누리는 방법은 없을까? 수탉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서라도 묻고 싶어 한다.

젊어서 한 때 일부일처제와 맞서 싸워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체제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자유를 좀 더 본질적으로 실현해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피투성이 몸으로 돌아와 복기해보면 반 일부일처제 투쟁의 대의는 사라지고 열다섯 배의 돈과 열다섯 배의 집과 열다섯 배의 쾌락에 대한 욕망이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부끄러운 고백을 들려주며 답을 구한다. 대의가 사라진 욕망에 대해 아직도 누군가는 격려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수탉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관찰자가 알기 어려운 다른 진실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의 탄생이 음양의 조화이니 암수 비율 역시 5050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나머지 수평아리들은 다 어디 있냐는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닭들의 시뻘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답해야 한다. 어디로 갔을까? 알을 낳지도 못하고 육계처럼 빨리 살이 오르지도 않아 식용으로 팔기도 힘든 산란계 수컷들은 대부분 태어나자마자 사라진다. 분쇄기에 갈리는 방식으로 사료가 된다. 이런 수많은 죽음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생명체의 크기가 작기 때문이고, 값이 적이 때문이다. 살생이라 불리지도 못하고 살 처분이 되고 적당하지 않은 자가 되어 도태될 뿐이다.

열 다섯 배의 절실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나, 수탉의 대답은 네가 그 죽음을 아느냐?’는 반문일 것이 뻔하다. 오히려 생명의 본질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된 90%의 수평아리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다시 무릎 펴고 고개 빳빳이 들고 다른 방법을 찾기 바란다. 일단, 용감하고 늠름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수탉과 나에게 서로 연민을 가지기 바란다. 서로 위로하기 바란다. 그 날갯죽지와 어깨동무 할 수 있을까? 그들의 꽉 차고 부산한 일상이 눈도 뜨지 못하고 사라진 어린 병아리들을 위한 열다섯 배의 어떤 노력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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