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읍성은 흙이 아닌 돌로 쌓은 성입니다”
“서천읍성은 흙이 아닌 돌로 쌓은 성입니다”
  • 고종만 기자
  • 승인 2018.10.31 12:49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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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지속협, 유승광 박사 초빙 서천역사문화탐방 실시
서천읍성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제11회 서천생태역사문화탐방에 참여한 학생과 주민, 지속협 회원들

“서천읍성은 토성(土城 )이 아니라 석성(石城)입니다”

지난 27일 서천군가능발전협의회 사회문화교육분과위원회(위원장 조국현) 주관으로 실시한 제11회 서천생태역사문화탐방에서 강사로 나선 유승광 박사는 “서천읍성은 돌로 쌓았음에도 일부 언론 등에서 토성으로 표기돼 있는데 잘못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 박사는 특히 서천읍성 축조시기가 잘못 알려져 있다며 축조시기를 조선 영조 27년 1751년에서 세종 때(조선왕조실록)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32호인 서천읍성은 성벽의 길이는 1068m, 높이는 3m, 14개의 치(雉 성벽에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전투를 할 때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켜 만든 성벽 시설물을 말함)로 축조돼 있다. 서해안으로 침입해 오는 왜구들로부터 양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이다.

서천읍성의 돌이 대부분 없어진 것은 비인과 서천이 통합된 1914년 이후로, 주민들이 성돌을 빼내 집을 짓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유승광 박사의 설명이다.  

현재 군청 민원실 앞쪽에 비석군(群)군에 얽힌 이야기도 소개했다. 농사짓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물 관리를 잘 한 구봉서 군수가 있는가 하면 서천군수를 지낸 뒤 동부승지 황연도관찰사로 자리를 옮긴 이명(조선왕조실록에 “악명 높은 군수로 서천에서 하던 짓을 그대로 하다니”), 간도 땅이 조선 땅이라고 주장한 암행어사 이중하 감계사(경계를 정하는 벼슬)의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이 가운데 이명의 비석을 받치고 있던 구(귀)도(龜趺)는 군청 앞마당에서 있다. 거북 모양을 한 이명의 구도는 현 비둘기예식장 옆 건물 지을 당시 발견된 것으로, 1998년 유승광 박사가 군과 협의를 통해 옮겨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의 구도 옆에 있는 작은 구도는 우물이었던 현 위치에서 발견된 2개 중 하나로, 나머지 하나는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하고 있다. 별도로 서천여고 정문 부근에도 1개의 구도가 있는데 누구의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탐방 프로그램은 “걷고, 보고, 듣고, 배우고 즐기는 서천읍 역사이야기”라는 주제를 가지고 서천군청, 서천읍성, 서천향교, 서천중학교내 위령탑, 길산마을 유래, 남산성등과 관련된 역사이야기를 유승광 박사의 설명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번 탐방 프로그램을 주관한 서천지속협 조국현 위원장은 “서천군 행정 소재지가 있는 서천읍에 대해 지역주민들과 학생들이 서천읍 역사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전문가를 통해 서천읍 역사에 대해 새롭게 재조명하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탐방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말다.

한편, 서천생태역사문화탐방은 서천지속협이 2008년도부터 지역민과 함께 하는 연안탐방프로그램을 2015년도부터 마산면, 2016년 장항읍, 2017년 판교면, 2018년 서천읍등 관내 2개읍 11개 면을 직접 찾아가서 걷고 듣고 보고 배우고 즐기는 탐방 형식의 연속 프로그램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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