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지기 책을 읽어<방기궁람경사方其窮覽經史>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살펴보면<력관치도歷觀治道> 책에서 읽을 때는 나라 다스리는 일쯤이야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운데<즉기시위국유반수則其視爲國猶反手> 그러나 실제로 나라 다스리는 일에 닥치면<급기림사及其臨事>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부지소조자유지不知所措者有之>
세종실록 7년 12월8일 계유癸酉일의 이 기록은 세종께서 의정부와 육조 여러 신하들과 정사를 보면서 나라 다스림의 어려움을 토로한 말이다. 세종대왕은 자타가 공인하듯이 엄청나게 공부를 많이 한 성군 중에 으뜸이신 분이시다.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았으며<호학망권好學忘倦>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수불석권手不釋卷>
일찍이 여러 달 동안 몸이 여의치 않으셨음에도<상위예수월嘗違豫數月> 글 읽기를 그치지 아니하셨으니<역독서불철亦讀書不輟> 태종이 근심하며<태종우지太宗憂之> 명하여 서적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다.<명수서적이장命收書籍以藏 세종실록 32년2.17.壬辰일> 이런 세종을 당시 세인들은 해동의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고 130년 후 율곡 이이는 평생에 걸쳐 임금에게 59편의 소차疏箚를 올리는데 여기서 임금 세종을 동방의 聖主라 칭했다.<율곡전서 권7소차5>
세종의 공부 이유는 간단했다. “경서를 깊이 연구하는 것은<궁경窮經> 생활에 쓰기 위한 것이다<소이치용야所以致用也>”라는 생활밀착형 유학인 것이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공부법을 ‘혈청지학泬聽之學’이라 한다.
좌구명의 말에 ‘혈청泬聽’ 이라는 말이 있다. 낮은데 사는 백성들의 절규라는 말로 목민관은 백성의 목소리를 마치 피붙이 하소연인 양 경청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춘추시대 8개국의 흥망성쇠를 다룬 21책 7만여 자로 지은 국어國語에 나오는 말로 군주 된 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라는 제자의 느닷없는 물음에 좌구명이 무심히 답했다는 말로 전해진다. 좌구명은 공자도 본받고자 했던 인물이다. 논어 499문장 중에서 한 호흡 길이의 문장 안에 유일하게 사람 이름을 두 번씩 거론해가면서 공자께서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다고 표현한 문장은 논어 공야장公冶長 5-24문장이 유일이다.
공자 말한다<자왈子曰> 번지르르한 말 꾸민 얼굴빛 지나친 공손<교언영색주공巧言令色足恭> 이를 좌구명은 부끄럽게 여겼는데<좌구명치지左丘明恥之>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구역치지丘亦恥之> 싫어하는 감정을 감추고 그 사람을 사귀는 것을<익원이우기인匿怨而友其人> 좌구명은 부끄럽게 여겼는데<좌구명치지左丘明恥之>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구역치지丘亦恥之>
논어에서 공부를 가장 많이 한 사람 둘을 꼽는다면 그중 첫째는 공자일 것이고 그 다음은 좌구명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좌구명의 공부의 벽을 단 네 자로 표현했는데 좌구실명左丘失明이 그것이다. 세상은 그런 그를 맹좌盲左라 불렀다. 시력을 잃은 좌구명이라는 말이다. 도대체 공부를 어떻게가 아닌 얼마나 많이 했기에 앞이 안보일 정도로 공부를 했더란 말인가.
“속담에<언왈諺曰> 하루가 늦어지면<일일지연一日之延> 10일이 늦어지고<십일지연十日之延> 10일이 늦어지면<십일지연十日之延> 한 해가 늦어진다<일세지연야一歲之延也. 세종26年 甲子年癸亥>”고 했다. 공부는 미루지 말고 하루 아침에 큰일을 하겠다고 덤비지도 말고 매일 작은 일부터 조금씩 하다보면 언젠가는 큰일도 해낼 수 있는 거다. 부답전철不踏前轍이라 했다. 앞 수레가 엎어진 바퀴자국을 보면 뒤따르던 수레가 조심하는 법이다.
요즘시대는 돈과 학력을 분리할 수 없고 노동과 공부 또한 분리할 수 없다. 50만 청년실업시대, 헬조선, 이러한 말들을 듣고 성장하는 요즘 학생들에게 공부보다는 용돈을 버는 알바가 더 현실적이겠지만 그래도 답은 공부에 있다. 공부는<학자學者> 눈으로 보고 이해하며<지도知睹> 귀로 듣고 느끼며<감이勘耳> 입으로 외워 완성한다.<성송成誦> 그런 후에<연즉然則> 세상과 엮이지 말고<세불응世不凝> 한계를 인정하고<지경知境> 분수껏 살라.<족하足下> 북송의 재상 범중엄의 말이다. 금쪽같은 청춘을 누군가의 영원히 마르지 않는 돈줄로 전락하지 말고 공부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