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월남 이상재 선생과 3.1운동(1)
■ 특집 / 월남 이상재 선생과 3.1운동(1)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9.02.20 16:19
  • 호수 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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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선생이 주도한 만민공동회, 민주공화정의 씨앗

입헌군주제 여는 ‘중추원신관제’ 공포, 개원 앞두고 좌절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민족사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19410일 망명지인 중국 상해에서 임시의정원이 개원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 재민과 삼권분립의 민주 정치 이념을 담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임시헌법) 10개조를 채택했으며 권력의 소재를 군주에서 국민으로 옮기고 민주공화제를 선언해 정부형태와 국정운영에서 민족 역사상 가장 큰 변혁을 가져왔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1898년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면서 평등사상을 고취시키고 입헌군주제를 관철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1907년에 결성된 신민회에 가담해 민주공화정을 논의했으며,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특사를 보내는 일의 산파 역할을 했다. 이 때의 신민회 회원들이 1910년 국권상실 이후 만주 등지에서 무장 투쟁을 벌였으며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이에 참여했다. 월남 선생은 1918년 가을부터 우당 이회영 등과 함께 고종 황제의 망명을 기도했다. 그러나 성사 직전 일제의 고종 독살로 실패했다. 고종 독살 사건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고종 황제의 장례식 인산날인 31일을 기해 전국으로 확산됐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만민공동회 활동에서부터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의 월남 선생의 활동을 2회에 걸쳐 알아본다.<편집자>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는 월남 이상재 선생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는 월남 이상재 선생

외세 배격 외친 만민공동회

1898310일 오후 2. 서울 종로에는 1만여 인파가 몰려들었다.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회장에는 청장년들이 갓을 쓰고 혹 장죽을 물고 두루마기를 걸친 모습으로 발 들여 놓을 틈이 없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7만 명이었다 하니 이 대회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하다. 장안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유례가 없었다.

독립협회에서 주최·주관하고 이상재 선생이 사회를 본 이 대회에서 러시아와 외세의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는 연설이 주종을 이루었다. 아울러 러시아의 군사교관, 재정고문, 노한은행을 철수시키기로 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민중의 물결이 서울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밖으로는 제정러시아의 본격적인 식민지 속국화 침략 정책의 강화와 열강의 경쟁적인 이권 침탈 요구가 자행되고 있었으며, 안으로는 친러 수구파 내각이 수립되어 이에 야합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98년부터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만민공동회 개최는 친러 수구파 정부 대신들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에 머물고 있던 외교관들에게도 경악할 만한 큰 충격이었다. 외국인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 순하디 순하여 무엇이든 빼앗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조선의 민중들이 그토록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러시아는 그달 17일 조세명목으로 차용하려 했던 절영도 석탄창고 기지 요구를 철회했으며 또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철수하겠다는 정식공문을 대한제국 정부에 통고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은 그달 19일 서둘러 군사교관을 해고하고 러시아 재정고문 알렉시에프도 해임해 돌려보냈다. 노한은행 역시 철폐됐다. 러시아가 동방정책에 일대 충격을 받자 일본도 국익에 손해가 올 것을 우려한 나머지 서둘러 이전에 빼앗아간 절영도 석탄창고 기지를 대한제국에 반납하고 민심의 동태를 살폈다. 만민공동회는 대성공이었다.

▲만민공동회에서 백정 출신 박성춘이 연설하는 모습
▲만민공동회에서 백정 출신 박성춘이 연설하는 모습

민주주의에 눈뜨는 민초들

만민공동회는 계속 이어졌다. 초기에는 참여한 사람들이 주로 지식인과 소상인들이었으나 점점 확대되어 학생, 교원, 종교인, 하층민까지 참여했다. 시민들은 점차 신분을 초월하여 나라의 일을 논의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자유로이 발표하였으며, 스스로 대표자를 뽑아 만민공동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등 독립협회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양상을 띠었다.

71일과 2일 종로에서 열린 독일 등 외국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공동회, 716일 종로에서 열린 의병에 피살된 일본인의 배상금 요구를 반대하고 경부 철도 부설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공동회 등은 독립협회와는 직접 관련 없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민중 대회였다.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모습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모습

사상 최초 의회, 개원 앞두고 좌절

만민공동회는 계속 이어졌고 민중의 힘을 등에 업은 이상재 선생을 비롯한 애국적 지식인들의 상소는 마침내 효과를 거두어 18981012일 박정양·민영환의 개혁파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월남 선생은 백성들의 권리를 왕권의 상위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또 관료는 임금의 신하인 동시에 백성의 종이라고 표현했다. 월남 선생은 불평등을 척결하기 위하여 백정 박성춘이 만민공동회에서 연설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불평등사회에서 평등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만민공동회의 주도세력은 신정부와의 협의하에 중추원을 개편해 의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뒤 의회 설립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개혁파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115일 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원하기로 하고 중추원 신관제(中樞院新官制 : 의회설립법)를 공포했다. 승세를 탄 만민공동회는 18981028일에서 112일까지 6일간 종로에서 대집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서울시민은 물론 독립협회, 국민협회, 일진회 그리고 정부대표로 의정부 참정 박정양 등 10여명의 정부 대신들이 참석하여 관민공동회로 불리기도 했다.

 

군대 투입에 의한 강제 해산

그러나 개혁파 정부는 의회 설립 하루 전인 114일 밤에 붕괴되었다. 의회가 설립되어 개혁파 정부와 연합하면 영원히 정권에서 배제되는 것이라고 판단한 친러 수구파는 독립협회 등이 의회를 설립하려는 것은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무대신 등으로 한 공화정(共和政)으로 국체(國體)를 바꾸려는 것이라는 내용의 익명서(匿名書 : 비밀전단)를 뿌린 것이다.

이에 고종은 자신이 폐위된다는 모략 보고에 놀라 11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걸쳐 독립협회 간부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키고 의회 설립령을 취소했다.

115일 이상재 등 17명의 지도자들이 경무청에 체포되었으며, 개혁파 정부가 붕괴되고 친러 수구파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서울 시민들은 삽시간에 수천명이 경무청 문 앞에 모여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열고 17명의 지도자 석방을 요구하면서 만 6일간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 시위하였다. 고종은 병력을 사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자 친러 수구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1110일 오후 석방했다.

이후 고종과 수구파들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해서 황국협회 아래에 조직되어 있는 지방 보부상들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이 때 일본공사 가토(加藤增雄)가 일본도 명치유신 초기에 군대로써 민회를 해산시킨 전례가 있음을 들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일거에 탄압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고종은 마침내 군대 동원의 결단을 내려 1223일 시위대(고종의 친위 군대)에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명했다. 1225일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불법화시키고 해체령을 포고하였으며, 430여 명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일거에 체포, 구금하였다. 1898115일부터 1223일까지 고종이 인화문 밖에 나가 군중을 직접 회유한 1126일 이후의 6일간을 제외하고는 한국 사상 최장기일인 42일간 철야 시위로 전개된 만민공동회는 러시아와 일본의 외세를 업은 고종과 친러 수구파의 무력 탄압 앞에 마침내 해산당하고 말았다.

 

만민공동회가 남긴 것

월남 이상재 선생 등 개혁세력에 의해 주도된 만민공동회를 통한 민권 운동은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지도력의 부재와 자연발생성과 분산성을 면치 못하였으며 봉건정부의 무력탄압에 대응한 적극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비록 실패했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영향을 남겼다.

우선 1898년의 가장 위험한 시기에 한반도까지 진출한 제정러시아를 요동반도로 후퇴시키고 국제 세력 균형을 형성하여 열강의 침략을 일단 저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때 획득된 세력 균형은 19042월 러일전쟁 발발 때까지 만 6년간 지속됐다. 또한 수많은 애국적 인사들을 배양하였으며 자유민권사상, 즉 민주주의사상을 시민들 사이에 보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후일 신민회에서 민주공화정의 논의로 발전하다 민주공화정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체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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