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서천 교육의 선구자
개화기 서천 교육의 선구자
  • 뉴스서천
  • 승인 2002.03.28 00:00
  • 호수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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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에 학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언제일까? 개화기 서천에서 처음으로 학교를 설립한 사람은강원로 군수로 알려지고 있다. 강원로는 1905년 비인 군수로 있으면서 인창학교를 설립하고 1907년 서천 군수로 부임하면서 서 창학교를 설립하였다.
인창학교(仁昌學校)와 서창학교(舒昌學校)가 소학교령에 의해서 설치된 학교인지는 불확실하나 군에서 설립하고 운영되었다. 인창학교의 교장은 강원로이며교감은 조돈승, 사무원은 채규철, 윤효석 등이었다. 인창학교는 비인군내 유지인사들의 기부금으로 설립되었으며, 날로 학생수가 증가하여 학교가 발전하였으나 재정이 어려워 청화역에속한 토지의 소작료를 학교에서받도록 청원한 사실이 있어 인창학교의 운영 실태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각사등록, 충청도편4) 비인에 있던 인창학교는교육 기능이 정지되었던, 비인향교 건물을 이용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전교 지낸 최병철씨는 말하고 있다.
또 1907년 강원로 군수가 서천군수로 옮기면서 세운 서창학교는 서천읍 군사리에 위치하여전주지방법원 서천출장소 건물을 이용하였다고 서천군지에 기록되어 있다. 조준구는 서천군 문장면 득락 1리에 거주하며 1904년 문장면장을 역임하고 1905년에는 서천군 지방위원을 지내고 동년 서창학교 평의장을지낸 사람이라고 대정 2년(1913)에 발간된 [조선신사보감]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박복호는 서천군 판산면 정산 2리에 살았는데 1911년에 서창학교 보통과를 졸업하고 1912년에 홍산군 농업강습소에 입학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서천군지(1929년), 조선신사보감(1913년)에 수록된 인명의 경력을 통해서 서창학교의 존재를 알 수 있을 뿐 학제나 교수과목은 알 수 없다.
개화기에 우리가 주목해야하는학교는 독립운동가 김인전 선생이 재직한 한영학교이다. 한영학교는 한산군 남하면 와초리 지사울에 위치한 사립 기독교 중등학교이다. 학교 설립 목적은 고등보통교육과 기독사도의 양성에 있었으며 교수 과목으로는 중학 예과, 성경, 국어, 한문,작문, 습자, 산술, 수학, 지지, 역사 등이 있었다. 통감부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명치 42년(1909) 5월 23일에 학교 설립이 인가되었으며 당시 교장은 부위렴이며 교사는 김인전 외 4명이고 학생수는 보통과 학생 10명,고등과 학생 16명이었다.
한영학교 출신 인물로는 화양면 화촌리에 거주하던 송기면, 송여직, 화양면 와초리에 거주하던 임학규, 한산면 안당리에 거주하던 김인두 등이다. 이들은 1919년 3월 28일 마산 신장에서 3·1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한영학교 외에도 한산 지역에는 기독 진신학교, 기산학교 등이 있었다. 진신 학교는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시재에 의해 설립되었고 학교장은이선식이며 학생이 20명이며 교사가 3명이었다. 한영학교나 진신학교는 모두 남장로교 계통의 기독교학교였다.
당시 일반 사립학교로는 보통과정의 기산학교가 있었다. 이승휴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학교장은 이종식이었다. 학생수는46명이며 교직원은 4명이었다. 기산학교의 위치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화기서천지역에서도 근대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한 군수 강원로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인창학교와 서창학교가 설립되게 되었으며, 기독교 계통의 한영학교는 고등과 학생을 양성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교육과정을 편성하여 후일 3·1운동의 주역을 배출하는민족 교육의 산실이었다. 또한 기독교 계통인 진신학교와 사립학교인 기산학교가 설립된 것으로 보아 개화기에 서천 지역에서도 교육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기에 인재 육성을 목표로 교육사업에 헌신한 강원노 군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07년선정비가 군내에는 두 3기가 세워졌다. 하나는 서면 주항리 칠성바위 고인돌 위에 우뚝 서 있고, 다른 하나는 판교면 판교리 농로변에 오고가는 이의 주목을받지 못한 상태로 오늘의 서천 교육을 지켜보고 있다. 또 하나는 비인중 앞 비석들과 나란히 서 있다.
그러나 민족 교육의 초석을 마련하여 1919년 삼일운동을 한산 신장에서 전개하는데 정신적바탕이 된 김인전 선생에 대한 추모비는 하나도 없다. 물론 1914년 전주 서문밖 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전주 삼일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20세기 전북 인물 50인으로 선정되어 널리 추앙받고 있으며, 전주 다가 공원 입구에는 그의 추모비가 서 있다. 이에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고장 화양면 이장단에서 김인전 선생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해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서천을 빛낸 인물을 꼽는다면 이곡, 이색,신광수, 이상재, 김인전, 이동백, 신석초 선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물에 대한 고증과 선양 사업을 통하여 우리 고장의 정체성을 찾아 갈 때 지방자치의 의미가 더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얼마 남지 않은6·13 지방선거에서 21세기 서천 교육을 위하여 헌신할 강원로 군수와 같은 인물이 당선되고, 김인전 선생 같은 인물이 발탁되어 서천의 인재 육성에 이바지하였으면 좋겠다.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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