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 100주년 기념특집
■ 3.1운동 100주년 기념특집
  • 편집국
  • 승인 2019.04.04 15:01
  • 호수 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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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가 연이어 열렸다. 28일 오후 문예의전당 소강당에서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원탁회의가 열렸으며, 29일 오전에는 92주기 월남 이상재선생 추모제가 한산 종지리 월남 선생 생가지에서 열렸다. 이어 마산면 신장리 일원에서는 12회 서천마산신장 3.1운동 재연 및 기념행사가 열렸다. 화보와 함께 행사 이모저모를 알아본다.<편집자>

 

평화와 통일을 위한 원탁회의

100년이 지난 현재 통일운동이 시대정신

▲28일 문예의전당 소강당에서 열린 ‘평화와 통일을 위한 원탁회의’
▲28일 문예의전당 소강당에서 열린 ‘평화와 통일을 위한 원탁회의’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에 대한 의지를 높이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기 위한 서천 주민 대상 원탁회의가 28일 오후 문예의전당 소강당에서 열렸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서천군협의회(회장 최재수)가 마련한 이날 회의에는 지역 단체장, 주민, 자문위원 등 80여명이 참석해 ‘3.1운동 100주년과 한반도 통일이라는 주제로 8개 팀으로 나누어 토론을 벌였다.

토론회에 앞서 유승광 공주대학교 객원교수가 ‘3.1운동 100주년 정신 계승과 통일의 꿈이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으며 토론회가 끝난 후에는 토론 결과에 대한 발표에 이어 다 함께 우리의 소원을 합창했다. 다음은 유승광 교수의 기조강연 내용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해방 후 시대정신과 통일>

3.1운동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만들었으며 우리 국민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해주었다. 1945년 대한민국은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됐다. 독립된 한반도에 어떤 나라가 세워질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임시정부 시절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미소의 영향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남쪽은 대한민국이, 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서 분단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서천 사람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제헌국회의원인 이훈구 박사는 기산면 내산정리 사람으로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이었으며, 같은 동네에서 이훈구의 아버지 이학규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구재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 기초위원으로 일했다. 한 동네 한 사람 밑에서 동문수학한 이 두 사람도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분단의 문제점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 지금도 우파정권이다 좌파정권이다. 저놈은 빨갱이다 극우이다. 색깔논쟁을 통한 국력 낭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분단시대는 정치적으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빼앗아간다. 분단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며 분단 이후 시대정신은 통일운동이다.

언제까지 분단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를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가. 통일의 꿈을 키워가야 한다. 100년 전 나라를 생각한다면 독립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통일운동이다. 자기가 스스로 맡은 곳에서 합리적으로 투명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통일운동의 시작이다.
 

92주기 월남 이상재 선생 추모제

월남 선생 묘 서천으로 모시자
유승광 이사장 제안

92주기 월남 이상재 선생 추모제29일 오전 한산면 종지리 월남 선생 생가에서 열렸다.

월남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유승광)가 주최하고 서천군과 충남서부보훈지청이 후원한 이날 추모제에는 주민들과 노박래 군수, 조동준 군의회 의장, 나소열 충남부지사, 신경희 교육장, 홍완선 서천경찰서장, 전익현·양금봉 도의원, 강신두·김경제·김아진 군의원, 한산향교와 비인향교의 유림들, 각급 단체장, 주민 등 300여명이 참여했다.

또한 화양초등학교에서는 전교생이 석순태 교장과 함께 참석했으며 동강중학교 학생들이 참석했다. 한산초·중학교 오케스트라단의 연주 속에 의식이 진행됐으며, 유승광 이사장의 추모사에 이어 노박래 군수와 조동준 군의회 의장, 나소열 충남부지사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추모사에서 유승광 이사장은 3.1운동 100주년, 월남선생 92주기를 맞아 1957년 천묘한 월남 선생의 묘를 다시 서천으로 천묘할 것을 제안했다. 유 이사장은 서천 군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월남 선생의 묘를 서천으로 천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월남 선생의 묘는 1957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한산에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천묘했으며 서울YMCA에서 관리하고 있다.

▲헌화하는 학생들 행렬
▲헌화하는 학생들 행렬
▲의식 연주를 담당한 한산초·중학교 오케스트라단
▲의식 연주를 담당한 한산초·중학교 오케스트라단
​​​​​​​▲추모시를 낭송하는 어린이
▲추모시를 낭송하는 어린이


12회 서천마산신장 3.1만세운동 재연 및 기념행사

서천마산삼일운동기념비
서천군민 1년내내 찾는 장소 되기를

​​​​​​​12회 서천마산신장 3.1만세운동 재연 및 기념행사29일 오전 마산면 신장리 일원에서 펼쳐졌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서천지부가 주최하고 서천군, 국가보훈처충남서부보훈지청, 서천교육지원청, 한국중부발전(), 서천군새마을금고, 농협중앙회 서천군지부, 서천축협, 충남민예총이 후원한 이날 행사는 마산면 신장3거리에서 그날의 함성을 재연한 후 3.1운동 기념비까지 행진을 벌이고 기념비 앞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날 재연행사에서는 식전행사로 서림국악원의 풍물공연과 김호자 원장의 살풀이 공연이 있었다. 이어 당시의 상황을 재연한 상황극이 펼쳐졌으며 신경희 교육장의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이어 1000여명의 참가자들은 모두 흰옷과 이마에 띠를 두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천삼일운동기념비까지 행진을 벌였다.삼일운동기념비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서천군립무용단의 식전 공연이 열렸다. 기념행사에서 박학배 유족 대표는 인사말에서 마산신장 3.1운동은 7000장의 태극기를 만들어 2000명이 목숨을 걸고 일어난 운동이었다오늘 하루뿐만이 아니라 1년 내내 이 장소를 찾았으면 좋겠다. 학생들은 교육의 장소로, 주민들은 휴식과 소득을 창출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행사를 준비한 김제원 위원장은 기념사에서 해방이 된지 70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일본은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고 전범들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다우리 스스로 민족혼을 깨우치고 3.1운동의 자주 정신을 되살려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노박래 군수의 격려사, 조동준 군의회의장과 나소열 부지사의 축사가 이어졌으며 일제만행 규탄 결의문을 낭독했다. 종교의식으로 기독교 대표의 기도가 있었으며 삼일운동기념비 참배 및 헌화를 끝으로 오후 1시경 행사의 모든 일정을 마쳤다.

▲“너희들은 너희 나라로 물러가라” 당시 상황을 재연한 상황극 장면
▲“너희들은 너희 나라로 물러가라” 당시 상황을 재연한 상황극 장면
▲선언문 낭독. 신경희 교육장
▲선언문 낭독. 신경희 교육장
▲일제 경찰 출장소에 감금된 동지들을 구출하러 가는 행렬
▲일제 경찰 출장소에 감금된 동지들을 구출하러 가는 행렬
▲서천군립문용단의 식전 공연
▲서천군립문용단의 식전 공연
▲박학배 유족대표
▲박학배 유족대표
▲기념식
▲기념식
▲서천3.1운동기념비 남녀상
▲서천3.1운동기념비 남녀상

서천삼일운동 기념비에는 한산 죽촌리 출신의 박경수 작가가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서천3.1운동기념비 비문

1919년의 3.1운동은 이날에 폭발한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에 항거하여 이를 되찾으려는 우리 온 민족의 비장한 결의를 만천하에 천명한 운동이었다. 남녀노소 빈부상하의 구별없이 온 민족이 한 덩어리가 되어 지축을 울리는 함성으로 만세를 외쳐 이 나라가 우리의 것임을 당당히 주장한 운동이었다. 우리는 맨손이요 적은 총칼이 있으나 이에 굴함없이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울 것을 하늘에 맹서한 우리 겨레의 살과 뼈에 선혈이 튀는 통분한 싸움이었다. 서울을 기점으로 한 이 운동은 피바람에 실려 삼천리 산과 들에 퍼졌으며 이해 삼월이십구일에는 우리 서천고을 월명산하 이곳 마산 새장터에서 장날에 맞춘 운동으로 거듭 폭발하였다. 이날을 기하여 우리 고을의 의사들은 미리 감절고개와 일광재 숲 속 등에 회동 은밀히 태극기 칠천여 개를 제작 장일 장꾼들에게 배포하였다. 하오 한시가 되자 마침내 장거리 돈대 위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이어 대한독립만세의 선창으로 이천 군중이 일제히 충천하는 만세를 외치며 온 장터를 누비기에 이르렀다. 목이 터지는 절규의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6명의 의사가 일경에 인치 저들의 경찰관 출장소에 감금되었다. 이에 의분한 우리 군중은 저들을 습격 감금된 동지들을 구출하였으나 이 때 2 명의 의사가 악귀들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에 더욱 격앙한 2천 군중의 만세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키고 즉각 기수를 서천으로 돌려 행진하였다. 그러나 그 함성 행렬은 한산을 2리 앞둔 죽촌 모새다리에서 행진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곳 냇둑에 무장 매복한 일대의 왜군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적의 무차별한 발포로 일진일퇴하던 우리의 만세행렬은 결국 력불급의 일시후퇴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로하여 우리의 무행한 의사들은 투옥 실형을 받고 수많은 양민이 태형을 당하였다. 이에 우리 후대들은 선대의 그 거룩한 얼을 기리며 이를 만대후까지 이어받들기 위하여 여기 유서깊은 새장터에 이 비를 세운다.

198731일 서천3.1운동건기념비건립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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