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하구 갈바탕에 우여가 살았다
금강하구 갈바탕에 우여가 살았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9.05.02 14:45
  • 호수 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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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은 우여 산란장…복숭아꽃 필 무렵이 제철
▲장항전통시장에 나온 우여. 복숭아꽃 필 무렵인 지금이 제철이다.
▲장항전통시장에 나온 우여. 복숭아꽃 필 무렵인 지금이 제철이다.

3월이 되면 화양면의 망월리, 옥포리, 와초리, 완포리, 용산리 포구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논은 대부분 우여가 알을 낳는 갈바탕이었다. 갈대는 금강하구에서 1차 생산자이다. 산란을 위해 우여가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인근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여 포획에 나섰다.

조선조 영조 때 이중환은 <택리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부여·은진에서 비로소 바다 조수와 통하여 백마강 이하 진강(鎭江) 일대는 모두 배편이 통한다. 은진·강경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서 금강 남쪽 들 가운데에 하나의 큰 도회로 되었다. 바닷가 사람과 산골 사람이 모두 여기에서 물건을 내어 교역한다. 매양 봄·여름 동안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을 때에는 비린내가 마을에 넘치고 큰 배와 작은 배가 밤낮으로 두 갈래진 항구에 담처럼 벌여있다. 한 달에 여섯 번씩 열리는 큰 장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화물이 모여 쌓인다.”

꽁댕이배라고 불리는 작은 무동력선을 이용해 조류를 따라 강을 오르내리며 포획을 하기도 했지만 배가 없어도 싸리나무나 대나무를 사용해 V자형으로 엮은 간단한 정치망인 개막이를 이용해 우여를 포획했다. 조류가 밀려오는 방향으로 입구를 벌려 놓고 썰물 때면 걸려든 우여를 거둬왔다.

멸치과 우여는 쉽게 상하는 생선이다. 우여는 이를 담는 그릇인 우께를 장착한 지게에 얹혀 내륙으로 운송되었다. 주로 배를 이용해 강경장으로 냈지만 갓잡은 우여를 지게에 지고 수십리 길을 걸어 한산장, 마산장(신장), 판교장, 부여 홍산장에 내다 팔았다. 그곳 사람들이 와서 우여를 떼어가 팔기도 했다.

▲ 조선 초기 겸재 정선이 위어잡이를 묘사한 그림 ‘행호관어도’
▲ 조선 초기 겸재 정선이 위어잡이를 묘사한 그림 ‘행호관어도’

조선 초기 겸재 정선이 행주산성 아래에서 고깃배들이 위어를 잡는 정경을 보고 그린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라는 그림이 전한다. 이 그림 옆에는 이런 글이 있다.

春晩河豚羹(춘만하돈갱)
夏初葦魚膾(하초위어회)
桃花作漲來(도화작창래)
網逸杏湖外(망일행호외)

늦봄엔 복어국이요
초여름엔 우여회라
복숭아꽃이 밀물 몰고오니
그물은 행호 밖으로 숨더라

조수가 밀려들자 우여잡이 그물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묘사했다.

우여가 알을 낳는 갈대밭은 거의 사라졌지만 하굿둑이 개방돼 수위가 오르내리면 반 수중식물인 갈대도 어느 정도 되살아날 것이고 우여들도 이곳에 산란을 하기 위해 몰려들 것이다. 갈대 뿌리가 주된 먹이인 큰고니들도 몰려들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또 우여회를 즐기기 위해 관광객들도 서천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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