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로 세상 따라잡기 /(3)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 팀 블레이크 넬슨 감독
■ 영화로 세상 따라잡기 /(3)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 팀 블레이크 넬슨 감독
  • 이창우 작가
  • 승인 2019.05.02 14:55
  • 호수 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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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은 선의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일 수 있다
영화 속 장면
영화 속 장면

영화 시작은 월터 교수 일상의 평범함에서 출발합니다. 이 순간 일상성이 가져온 결과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어이없는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월터 교수는 금요일이면 아내에게 꽃을 선물하던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는 뉴욕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선의가 악의로 변한 그날은 그가 하는 마지막 강의가 있던 날이기도 합니다. 월터 교수에게 불행은 예고없이 닥칩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선의가 힘을 잃는 경우는 다반사이기도 하죠.

월터 교수의 강의를 듣는 대학원생인 소피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어울릴 수 없고, 삶에 대한 회의와 무자비하게 변하는 사람들로 고통 받습니다. 철학이 사람들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며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자해를 합니다.

마지막 강의를 하고 오던 그 날 월터 교수는 소피에게서 자해 도구를 전해 받습니다. 소피에게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될 시작을 만나게 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스크린에서는 각각 등장인물의 일상이 펼쳐집니다. 영화 첫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한평생 마약 중독자로 살아온 남자 조셉은 그 날 정신병원에서 퇴원합니다.

병원 침대에서 그가 들었던 친구의 마지막 대화 끝은 사랑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마약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시킨 친구였지요. 그 후 그의 행동에 약간의 변화도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의 마지막 행동을 보면 친구의 사랑한다는 그 말, 그 힘이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가 월터 교수와 마주친 편의점에서 5달러의 선의는 의미심장합니다. 그 선의로 월터 교수는 생명을 구하게 되고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집니다. 바로 그 순간 50센트의 도움을 친절하게, 한 잔의 커피로 대신하려던 선의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 현장에는 결혼 생활의 무미건조함에서 아내를 두고 내연녀와 함께 마지막 밤을 보내던 샘이 등장하고요. 샘은 이 사건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마지막 강의를 하고 아내에게 전할 꽃다발을 사 집으로 가던 그 날, 우연히 세 사람이 만난 겁니다. 50센트로도 인간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불행이 가능하다는 게 어이없는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불행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셨는지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은 나를 비껴가기에 이슈가 되지 않는 한 그다지 큰 감흥 없이 지나곤 했던 것 같습니다.

별문제 없이 이 세계에서 작은 한 조각 내 세상은 잘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문득 이 영화를 접하며 만난 감정은 2013년 여름, 그 날로 데려갔습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문하는 일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태안 해병대 캠프라는 익숙한 이름과 당시 사고가 난 학교와 연결된 십 대들이 내 주변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로 속속 알려지는 이야기는 우리 교육의 부실함을 여지없이 드러내 주었죠.

2013718일 밤을 하얗게 지나면서 군사훈련이 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상명하복과 자율성을 침해하는 교육행정의 시대착오는 언제 멈출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4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지금까지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304명 목숨이 심해로 가라앉았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내 눈 앞에 있는 커다란 배가 스르르 가라앉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요. 더 이상 누군가의 불행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지내왔던 지금까지 시간이 월터 교수의 하루와 겹쳐지면서 다시 또 그 시간을 꺼내게 했습니다.

영화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의 원제는 ‘Anesthesia’로 마취, 마취 상태, 무감각증을 뜻합니다. 중의적인 영화 제목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죠.

이 세계는 무감각할수록 안전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살도록 세계는 별 볼 일 없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요. 영화 원제만큼 이중의 의미가 나의 선택을 머뭇거리게 할 테지요.

선의와 악의가 교차하는 가운데 소피의 자해가 충분히 마음으로 느껴지거든요. 자해가 반복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겠죠. 삶의 이중성을 오롯이 받아들여야 살아질 수 있다는 아이러니.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에도 대학원생 소피의 물음에 관한 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똑. . . 기계음과 함께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는 내내 검은 화면과 글자들 앞에서 지나온 시간과 현재, 또 내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감독은 관객에게 답을 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류가 찾아가고 있는 그 진리를 향한 끝나지 않을 이야기겠지요.

 

우리는 결국 멋지게 그러나 가슴 아프게 혼자입니다. 이런 공허감 속에서 철학은 최악의 경우 구시대 관심사로 전락합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논의를 제시해온 의미론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상대주의가 되고 맙니다. 철학은 의미를 잃어버린 자아를 탐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자극이 될 만한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질문들일까요?

요컨대 이런 거죠.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것인가? 그들은 지금 어떤가 묻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고 있습니다. 다음 세기 여러분의 시대가 오면 우리는 무엇으로 버틸까요?”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한 부분을 이 영화로 만날 그대와 나누고 싶습니다. 그 답을 찾아가는 지금, 우리는 홀로이면서 함께일 수 있습니다. 50센트가 부른 악의에 찬 분노가 결코 인류의 끝은 아니라는 믿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존경의 대상에 기대지 않고 이제 스스로 찾고 싶어.”

월터 교수가 은퇴할 결심을 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내 작은 선의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일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무감각한 계절로 스르르 지나는 시간이 더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바람이 기분 좋은 날 익숙함이 주는 평온에 몸을 맡기며 살아나는 감각들에 손짓합니다.

선의와 분노가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월터 교수의 선의는 내 손 끝을 떠나 사라지는 풍선마냥 안타깝기만 합니다. 하지만 선의를 담아 다시 풍선을 띄우고 싶어집니다. 이 세계에서 무기력하게 마취된 채 무감각한 내가 아니라 늘 깨어나 어린 손주의 웃음으로 맞는 아침처럼 선의가 이룬 아름다운 힘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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