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중고제 소리를 찾아서(1)중고제 집대성한 김성옥과 강경포구
■ 기획취재/중고제 소리를 찾아서(1)중고제 집대성한 김성옥과 강경포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9.05.29 12:07
  • 호수 9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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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판소리 명창 대부분 충청도 출신

강경포구 김성옥, 진양조 창안…“판소리계 혁명”

연재를 시작하며

 

▲판소리도. 기산풍속도첩
▲판소리도. 기산풍속도첩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가 한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 노래)와 아니리(, )로 엮어 발림(몸짓)을 곁들이며 구연(口演)하는 창악이다.

조선 중·후기에 불리기 시작한 판소리는 서민층에서부터 위로는 임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에 의해 사랑을 받으며 발전해 왔으며 일제 강점기에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그 맥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으로 1964년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70년대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그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있다.

흔히 판소리가 전라도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판소리의 발생지는 충청지역이다.

충남대 국문학과 명예교수인 사재동(82) 박사는 <백제권 충남지방의 민속과 문학>(중앙인문사, 2006)이란 저서에서 광대의 전국적 조직의 본부가 충남에 위치해 있었고, 충청도(公淸道)의 재인이 그 조직체를 통할(統割)하는 도산주(都山主)와 도대방(都大房)의 소임을 맡았는가 하면, 충남지방에서 하한담·하한돌(목천최선달(홍성 결성만화·유진한·하은담·고수관(서산 해미송인영·임춘학(서천 한산이봉국·김난득·손훤출·염수·방만춘(서산 해미김성옥(논산 강경김제철·최낭청·송수철(청양정춘풍·김정근(논산 강경윤영석(당진 면천정흥순·최상준(서천 한산백점택(연기황호통(공주박상도·강재만(금산김석창·이동백(서천 종천김창룡(서천 장항김봉문(서산) 등 판소리계의 기라성 같은 인재(명창과 후견 문사)들이 많이 배출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판소리는 충남의 부여·공주·논산·연기·서산·서천·당진·금산·천안 목천에서 연원해 전개되었다고 주장했다.

판소리 전승지역은 전라도·충청도 서부와 경기도 남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이르며 지역적 특성과 전승 계보에 따른 파가 생겼다. 전라도 동북지역의 소리제를 동편제(東便制)라 하고, 전라도 서남지역의 소리제를 서편제(西便制)라 하며, 경기도·충청도의 소리제를 중고제(中高制)라 부르고 있다. 뉴스서천에서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사업으로 충청지역의 중고제 소리의 현장을 답사하고 인물들을 드러내 지역의 문화예술 유산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기획취재를 마련해 1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판소리의 비조 하한담과 최선달

완문등장팔도재인(完文等狀八道才人)’1824(갑신년) 5월 팔도의 재인들이 호조에 올린 등장과 호조의 처분 내용이 적힌 공문서로 갑신완문이라고도 한다. 판소리사에서 공문서로 표시된 유일한 방증자료이다.

이 문서에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사신이 올 때, 산대극을 거행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각 도 재인도청을 통합할 목적으로, 각 도 소임들이 서울에 모여 행방회를 열고, 전국적인 규모로 기구를 재조직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완문등장팔도재인을 통해, 당대의 재인청이 참가했던 행사, 행사에서의 연행 내용, 재인청의 구성 및 성격 등에 대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서는 조선후기 연희사에서 주목할 만한 자료이다. 이 문서에서 하한담(하은담)과 전기 8명창에 속하는 고수관(고천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하한담은 숙종·영조 때의 판소리 명창이다. 판소리 가창(歌唱)의 시조(始祖)로 알려져 있으며 출생지 및 그에 관한 주변은 미상이다. 다만 옛날 가객(歌客)들이 판소리를 가창(歌唱)할 때 소리풀이(역대 가객의 이름을 연대적으로 엮어 부르는 형식)를 하는 중에 그의 이름이 처음에 나오고 있다.

하한담과 함께 판소리의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 홍성 결성 출신의 최선달이다. 1940년에 <조선창극사>를 펴낸 정노식은 하한담과 최선달(충청도 홍성 출신)이 광대의 효시라고 했다. 유성준과 함께 판소리 이론과 실기가 뛰어났던 명창 전도성(全道成)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지난 2월 홍성군의회 장재석 의원은 군의 5분발언을 통해 전국에는 문인, 명창 등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지역을 빛낸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관이 설립돼 지역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최선달 명창 기념관을 건립해 우리 지역의 다양한 역사 체험 볼거리 제공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언했다. 또한 충남도와 중고제 판소리의 주요 활동지역인 홍성을 비롯한 서산·서천·공주·논산 5개 시·군을 중심으로 중고제 복원 전승을 통해 중고제 문화유적을 발굴, 복원하고 정보 인프라를 확장해야 한다최선달 명창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 지역의 관광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기념관과 문화 공간 확보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번성했던 포구 강경, 판소리 중심지로

▲김성옥 생가터에서 바라본 강경포구 자리

고대로부터 물자가 이동하던 주된 통로였던 서해와 금강의 뱃길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상업이 발전하면서 경제적 번성의 토대가 되었으며, 문화의 탄생지이자 이동통로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평양, 대구와 더불어 3대 경강으로 불렸던 강경(충남 논산시)은 해양문명과 내륙문명이 만나는 접점이었다.

내륙 깊숙이 자리잡은 강경은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다. 조기의 성어기인 3~6월에는 하루 백 여척의 배가 드나들었고 여각, 객주, 상선을 갖춘 거상들이 이곳을 찾았다. 1900년 말 일본 영사의 조사에 따르면 1년 동안 금강을 오르내린 선박이 15천여척이이었다.

금강은 강의 흐름이 완만해진 하류지역에 이르러 400~500석의 쌀을 실은 선박들이 오르내렸다. 충남의 공주, 은진, 부여, 임천, 한산, 홍산과 전북의 용안, 함열, 임피 등은 이러한 내륙 수운과 관련이 깊은 곳들이다.

 

▲강경읍 옥녀봉 아래에 있는 김성옥 생가터​
▲강경읍 옥녀봉 아래에 있는 김성옥 생가터​

강경 옥녀봉 서쪽 산 중턱에 있는 중고제 판소리의 창시자 김성옥 생가터를 둘러보았다.

논산천과 강경천이 금강 본류로 흘러드는 즐펀한 곳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옥녀봉이다. 높이는 비록 43m밖에 되지 않지만 정상에 오르면 동쪽으로 멀리 황산벌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서해를 향해 달리는 금강의 모습이 장쾌하다.

강경포에 강경장이 서면 금강 하류에서 해산물을 가득 실은 돛단배와 여러 지방의 특산물을 실은 무역선들이 몰려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들도 곧바로 들어와 뱃사람들과 장사꾼, 구매자들과 약장수들로 시끌벅적 했고 술집마다 노래 소리가 대낮부터 끊이지 않았다 한다.이처럼 육지의 농산물과 바다의 수산물이 모여들어 들고나던 물류의 중심지 강경은 조선후기로 접어들며 한층 진화를 거듭하던 판소리의 대소비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판소리계의 혁명 진양조 탄생

강경포구의 중심은 바로 옥녀봉 아래 금강변이었다. 수백척의 배들이 옥녀봉 기슭에 늘어섰고 이를 훤히 내려보는 옥녀봉 서편 중턱에 중고제의 시조로 추앙받는 김성옥의 생가터가 있다.

김성옥은 논산시 강경읍 일끝리 태생이다. 그는 논산을 중심으로 한 금강유역 일대에서 중고제를 발전시켰으며 또한 판소리 전체를 보더라도 성악계의 일대 신발견인 진양조를 창시해 당시 판소리계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판소리 장단은 중머리, 중중머리, 자진모리 장단만 있었고 진양조는 없었다. 김성옥은 후에 여산으로 옮겨 살다가 나이 삼십여세에 요절했는데 학슬풍으로 다리를 쓰지 못하고 수년간 병석에 누워있으면서 가곡을 연구하다가 진양조를 창조하게 되었다.

김성옥은 강경과 인접한 익산 웅포에 살던 송흥록과 처남매부지간으로 송흥록이 종종 문병차 찾아왔는데 어느날 송흥록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요즘은 병세가 어떠하며 과히 고적하지나 아니한가하고 늦은 중머리로 소리 했다. 이에 김성옥이 누운 채로 고독의 비애를 몹시 느껴이하면서 진양조로 화답했다. 늦은 중모리에 한 각을 더 넣으면 진양조가 된다. 이러한 진양조를 처음 들은 송홍록은 가계(歌界)의 일대 발견이라 칭송하고 송흥록과 김성옥은 이를 더 연마하여 진양조의 완성을 보았다고 한다.<한국판소리 소사. 박황. 1976 신구문화사>

김성옥은 서로 교류를 통해 송흥록의 동편제 창시에 음악적인 토대가 되어 주었다. 동편제는 서편제로 진화 발전했다.

한편 강경에서 태어난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1839~1896)은 아버지 김성옥으로부터 이어받은 중고제를 더욱 발전시켜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장항 성주리로 이거해 아들 김창룡과 종천면 도만리 출신의 이동백을 가르쳤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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