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낡은 별리(別離)
■ 모시장터 / 낡은 별리(別離)
  • 박자양 칼럼위원
  • 승인 2019.07.31 15: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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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쳐 입은 얇은 겉옷을 편히 하느라 이리저리 당기고 펴고 하다가 느닷없이 부욱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더듬더듬 소리 난 부위를 찾아 만져보니 확실하다. 찢어졌다. 이 나이에 내가 이리도 힘이 남아도나 싶기도 하고 힘 조절이 안 되나 싶기도 하고 여하튼 당황스럽긴 매한가지다. 겉으로 드러난 위치가 아닌 덕분에 그냥 입은 채로 돌아치며 하루를 살다 저녁을 맞았다. 그 새 까맣게 잊고 잘 준비를 하며 옷을 벗다 보니 한 쪽 소매가 너덜너덜 꺾이고 헤진 나비 날개처럼 축 늘어진다. 벗어들고 이리저리 뒤적여보니 참으로 골고루도 낡았다. 하던 짓을 멈추고 멍하니 서서 바라본다. 함께 부대낀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십 수 년 만에 고향땅에 돌아와 들숨 따라 들이 마시던 공기마저 아직 설던 시절 자동차 뒷좌석 한 귀퉁이에서 꾸벅꾸벅 졸며 서둘러 성묘를 다녀오던 날이었다. 잠도 깰 겸 잠시 휴게소에 들른 길에 근처 할인매장을 둘러보다 즉흥적으로 구입했던 옷이다. 타향살이 십여 년 동안 단 한 켤레의 양말도 산적 없던 터라, 상상을 넘어서는 값싼 가격에 그만 정신이 출타하고 말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의 돌출행동에 동행했던 모두가 의아해 했지만 뭐 그건 그리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 시점에 난 주변인들에게 그저 간만에 보는 화성에서나 살 법한 신동(신기한 동물) 같은 존재였으므로. 그리고는 한 여름 복중을 제외하곤 늘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그러길 이 십년이다. 낡아 찢어져 늘어진 옷소매를 보고서야 세월을 꼽아본다.

낯선 무리와 첫인사를 나누고 함께 일 해보겠노라 다짐하던 날, 칼퇴근하고 골프채를 짊어지고 나간 상사 밑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밤샘 근무로 곤죽이 되어 새벽녘에 숙소로 기어들어가던 날, 윗사람 대접을 무척이나 받고 싶어 하던 누군가로부터 어처구니 저당 잡히신 부당한 질책에 꼭지가 돌고 분을 못 이겨 이 빠진 머그잔을 방화철문에 집어 던져 박살을 내고 혼자 식식거리던 날, 꼭두새벽부터 쏟아지는 비를 뚫고 코르크 쓰레빠를 가슴에 품고 맨발로 출근하며 주변인들의 묘한 시선을 받던 날, ATM앞에서 신용카드로 무얼 어찌해야 돈을 인출할 수 있는지를 몰라 헤매던 날, 더 할 수 없이 푹 썩어 반경 10킬로미터 내로도 접근하고 싶지 않은 갯가 뻘밭을 온몸으로 헤집고 다니던 날, 같은 비정규직 신세로 언제 잘릴지 몰라 좌불안석인 동료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대책은 커녕 메아리도 없는 푸념만 쏟아놓던 날, 수 없이 많은 날들을 함께했던 그가 이제는 걸레로도 쓰기 어려울 지경으로 낡아 작별을 고하고 있다.

참도 벼락을 떨며 살았다 싶은 데 생각에 이르니 뭣 땀시석자가 망막을 뒤덮는다. 그간 떨고 다닌 벼락 덕분에 나 대신 분()을 삭이느라 저리 낡아버렸나 싶어 슬쩍 미안한 마음도 들고, 아무튼 그만이 아니라 나도 세월을 함께 맞았음을 실감케 하는 저녁이다. 다른 옷을 꺼내느라 서랍을 여니 한켠 구석에 개어져 자리한 옷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대학졸업 직후에 노점상에서 구입한 물건이다. 허니 내게 온 지 사십 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도 아직 멀쩡하다. 물건도 사람 같아 낡아지는 속도나 수명이 제각각이다. 허니 배경과 사정을 고려치 않은 수평비교는 무엇이든 금물인가 싶다. 사십이 다 되도록 잘 버틴 그는 넣어두고 이십 년 만에 형체가 무너진 그만 들고 나왔다. 무정(無情)에도 성()이 있다던가. 고마움과 미안함을 한 데 묶어 떠나보낸다. 걸개의 노여움을 몽땅 짊어지고 가는 그와 이제 헤어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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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2019-09-05 11:25:02
내게 20년 함께한 물건이 뭐가있나?
찾아보니 고장나 버린 휴대용 소* cd플레이어..
함께 몇년? 올땐 귀한물건이었는데
보낼땐 필요없는..씁쓸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