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도지정 무형문화재의 현재와 미래/(3)서천 부채장 이광구
■ 기획/도지정 무형문화재의 현재와 미래/(3)서천 부채장 이광구
  • 고종만 기자
  • 승인 2019.09.05 15:17
  • 호수 9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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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 형상화한 공작부채, 왕에게만 진상

서천 부채장, 먹고사는 문제 해결 없이는 후대 전승 불가

무형문화재 전수조사 통해 맞춤형 지원책 마련 맥잇기 절실

이 기사는 충남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공작부채를 들고 있는 이광구·유진순 부부​
​▲공작부채를 들고 있는 이광구·유진순 부부​

처서가 지나면서 더위가 한풀 꺾였지만 한낮에는 여전히 덥고 곡식을 여물게 하는 가을 햇볕이 따갑다. 해마다 한여름만 되면 집집마다 모깃불로 연기가 자욱하다. 멍석을 깐 마당에서 온가족이 둘러 앉아 풋고추를 넣어 매콤하면서도 짭조름한 강된장에 가마솥에서 쪄낸 호박잎 하나면 밥 한 그릇 뚝딱 비웠던 기억이 새롭다. 밥을 먹고 나면 할머니 무릎은 필자의 전용 베개나 다름없었다. 할머니가 부쳐주시는 부채 바람은 선풍기나 에어컨에서 느끼지 못한 맛과 정취가 있다.

부채는 죽부인과 함께 무더위를 날려주는 기구로 사랑받아왔다. 부채는 부치는 채였다가 이 말이 줄어서 지금의 부채가 됐다. 가는 대오리로 살을 만들어 넓적하게 벌려서 그 위에 종이나 헝겊을 바른 것이 부채인데 한자로는 선자(扇子)’라고 한다.

고려 때 송나라 사람 손목(孫穆)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우리말의 부채를 표기해 선왈부채(扇曰孛采)”라 하였고, 15세기 조선 성종 때의 두시언해에는 고추수화선(高秋收畫扇)”ᄀᆞᅀᆞᆯᄒᆡ 그륜 부채를 ᄀᆞ초고라고 번역하였으며, 동 시대의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도 타선자(打扇子)”부채질 ᄒᆞ였노라로 번역하였다.

16세기 조선 중종 때 사람 최세진(崔世珍)훈몽자회와 한호(韓濩)천자문에도 ()’부채 션이라 하였음을 보아 고려 및 조선시대에도 부채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류가 언제부터 부채를 만들어 사용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중국 진()나라 때의 학자 최표(崔豹)고금주(古今註)’에 보면 중국의 순()임금이 오명선(五明扇)을 만들었다 하였고, 그 이유로서는 순임금이 요()임금의 선위(禪位)를 받아 임금이 된 뒤, 현인을 구해 문견을 넓히고자 오명선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 한()나라 때와 당나라 때에는 착한 사람을 추거하는 사람에게 주는 기념물로서 사용하였다고 했다. 송나라 때의 학자 고승(高丞)사물기원(事物紀原)’ 황제내전(皇帝內傳)에 오명선의 기록이 있으나, 이 역시 오명선이라고 하는 뜻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리고 초량선(招凉扇)은 주나라 무왕이 만든 것이라 했다. 이에 대한 서양학자들의 통설은 중국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부채는 일본의 여주(女主)인 신공왕후(神功王后)가 박쥐의 날개를 보고 부채를 만들었다 했다.

 

부채의 종류

부채에는 방구부채와 접부채로 나뉜다.

방구부채는 부채살에 깁[]이나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형의 부채를 말한다. 한자로는 단선(團扇) 또는 원선(圓扇)이라고 한다. 도지정 무형문화재인 서천 공작선을 비롯해 오엽선(梧葉扇연엽선(蓮葉扇파초선(芭蕉扇태극선(太極扇아선(兒扇오색선(五色扇까치선·진주선(眞珠扇청선(靑扇홍선(紅扇백우선(白羽扇팔덕선(八德扇세미선(細尾扇미선(尾扇송선(松扇대원선(大圓扇) 등이 있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채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접부채는 한자로는 접선(摺扇) 또는 접첩선(摺疊扇)이라고 한다. 접부채에는 합죽선을 비롯해 (白扇, 白貼扇칠선(漆扇유선(油扇복선(服扇승두선(僧頭扇어두선(魚頭扇사두선(蛇頭扇반죽선(班竹扇외각선(外角扇내각선(內角扇삼대선(三臺扇이대선(二臺扇단목선(丹木扇채각선(彩角扇곡두선(曲頭扇소각선(素角扇광변선(廣邊扇협변선(狹邊扇유환선(有環扇무환선(無環扇)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부채의 종류와 명칭은 방구 부채의 경우에는 부채살의 모양과 부채 바탕의 꾸밈에 따라 명칭이 붙은 것이고, 접부채의 경우에는 부채살의 수와 부채꼭지의 모양과 부속품 및 부채 바탕의 꾸밈에 따라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한국문화민속대백과사전 부채인용)

​​​​​​​▲한 어린이가 엄마와 함께 부채 만들기 체험에 몰두하고 있다.
▲한 어린이가 엄마와 함께 부채 만들기 체험에 몰두하고 있다.

공작선 삼국사기 견훤조 첫 등장

충청남도 도지정 무형문재 제21호 서천부채장 이광구 기능보유자가 만드는 공작선은 왕실에서만 사용됐던 부채였다. 우리나라 문헌에서 공작선이 등장한 것은 1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문화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삼국사기(三國史記)’ 견훤조에 우리 태조를 추대해 즉위했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그 해 8월에 일길찬(一吉飡) 민극(閔郤)을 파견해 이를 하례하고 드디어는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대화살[竹箭]을 보냈다라는 대목이 있다.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공작선을 보냈다는 이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도 나온다. 공작선은 남방의 여러 나라에서도 공작의 깃으로 둥근 부채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견훤이 하례품으로 주었던 공작선도 방구부채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광구 기능보유자가 만드는 공작선은 둥근 부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손잡이 부분은 단단한 재질의 참죽나무로 공작 머리 모양으로 조각해 붙여 만든다. 그가 참죽나무를 사용하는데 는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공작선의 값어치를 높여줄 수 있는 참죽나무 본연의 적갈색이 짙어 기품을 더해주기 때문이란다.

 

서천공작선 이광구씨 집안 4대째 맥 이어

서천 공작선은 기능보유자 이광구 씨 집안에서만 4대째 이어 오고 있다. 19971223일 충남도지정 제21호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광구씨는 아버지 고 이한규씨에 이어 공작선 맥을 잇고 있다.

31녀 중 장남이었던 이광구씨는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한 뒤 아버지 옆에서 50여년 넘게 공작선과 함께 해왔다.

이광구씨 집안에서 공작선을 만들게 된 계기는 증조부인 이을용 선생이 청양군 적곡면 화산리

처가로 이사가 광부 일을 하면서 소일거리로 선대로부터 배운 공작선을 제작하면서 부터란다. 이광구선생에 따르면 당시 아버지 외가를 찾았던 일본인이 공작선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구매의사를 밝히자 증조부께서 이 부채는 선대께서 만든 부채이고 또 대대로 내려오는 선대의 유물이어서 팔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이 일본인은 며칠 후 다시 와서 부채를 팔라고 조르자 증조부께서 부채 2개 중 하나를 쌀 다섯 말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일본인에게 판매한 부채는 이광구씨의 고조부 이군중이 증조부 이한규 선생에게 선친이 만든 것이니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해서 보관해왔던 부채 중 하나였다고 한다,

오늘날 서천 공작선이 빛을 보게 된 데는 증조부 이을용이 일본인에게 부채를 팔고 난 뒤 선대의 가업인 공작선을 다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후대에 기술을 전수했기 때문이다.

이광구 선생의 아버지 이한구 선생은 6.25민족동란이 발발하자 청양 외가에서 한산면 지현리로 이사한 뒤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배운 목수일로 가계를 꾸려가면서 소일거리로 가업인 공작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한규 선생 역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마지막 부채를 고가 매입을 제의한 골동품상에게 팔았다.

오늘날 이광구 선생의 증조부와 아버지가 선친이 만든 것이니 소중하게 보관하라했던 고조부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면서 선대가 만들었던 부채는 모두 사라지게 됐다. 선대가 만들었던 공작선과 현 이광구 선생이 제작한 공작선과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이광구 선생 역시 솜씨 좋은 아버지 곁을 지키면서 가업인 공작선 제작에 정진하면서 80년대 후반 부채 판매 수익으로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중국산 저가 부채가 국내에 들어온 이후 수입액이 줄어들면서 현재는 연매출액이 700~800만 원대로 줄었다고 한다.

▲이광구 선생이 제작한 7가지 형태의 부채.
▲이광구 선생이 제작한 7가지 형태의 부채.

한산 공예공방 차려놓고 공작선 만들기 몰두

현재 이광구 선생은 부인 유진순 여사와 함께 한산모시관 건너편에 조성된 공예공방에 입주해 공작선 주문제작과 함께 방학은 물론 평일 부채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부채 만들기에 전념해오고 있다.

지난 819일 필자가 이광구 선생의 공방을 찾았다. 이날 이광구 선생 부부는 인터넷을 통해 주문제작 의뢰가 들어온 부채 납품을 위해 눈 코 들새 없이 바빴다. 공작선 자루에 댓살을 끼우고 이광구 선생이 직접 제작한 함석으로 만든 살 틀에 부챗살을 올려 고정시킨 뒤 부채를 만든다. 맨 먼저 부챗살 위에 명주를 풀칠해 붙인 뒤 충북에서 주문 제작한 고급 한지를 붙여 마감한다. 다른 한 면도 같은 방식으로 제작한다.

현재 공방에서 제작중인 부채는 대표적인 공작선을 비롯해 산봉우리 형상의 산봉선, 연화선, 선녀선. 화봉선, 나비선, 맨드라미선 등 7종에 달한다. “은행잎 모양 부채를 새로 선보일 예정이라는 유진순 여사가 가장 좋아하는 부채는 맨드라미 선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느 날 남편 이광구 선생이 마당에 핀 맨드라미를 보자마자 맨드라미꽃을 닮은 부채를 만들어 선물했다는 것이다. 남편에게 선물 받은 맨드라미 부채를 애지중지하며 공방에 걸어놓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유진순 여사 역시 시증조부와 시아버지의 경우처럼 손님에게 팔았다고 한다.

부채를 제작하는 중간에 부채 만들기 체험 객들이 수시로 찾는다. 필자가 찾은 지난 18일에는 경기도 용인에서 왔다는 일가족 4명이 부채 만들기 체험에 나섰다. 체험에 나선 아이들은 부모의 도움 아래 자신만의 부채를 만들어보며 즐거워했다. 체험객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다양하다. 이광구 선생 부부 공방을 찾은 체험객은 올 3~6월까지 200명이 찾았다 한다. 모시문화제가 열린 사흘 동안에만 전체 체험객의 75%150여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광구 기능보유자에게는 전승보조금으로 월 110만원을 받는다. 모시축제 기간에 공개 행사비로 240만원을, 부채 제작에 필요한 한지와 포장재 구입비로 240만원을 자치단체로부터 지원받는다.

 

나이는 먹어 가는데 맥 이을 후계자는 구하기 어려워

▲부채 자루에 댓살을 끼우고 함석으로 만든 살 틀에 부챗살을 올려 고정한 뒤 한지를 붙이는 방식으로 만든다.
▲부채 자루에 댓살을 끼우고 함석으로 만든 살 틀에 부챗살을 올려 고정한 뒤 한지를 붙이는 방식으로 만든다.

​​​​​​​수년 전부터 체력의 한계 때문에 농사 채를 모두 팔고 공방에서 작품 활동에만 전념한다는 이광구 선생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1946년생으로 올해 73세이다. 가업인 공작선 제작 맥잇기가 자신의 대에서 끊길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13녀를 둔 이광구 선생의 공작선 맥잇기에 나선 이는 사위 유아무개씨(2007년부터 3년간 부채 제작 교육을 받음) 한 명이다. 무형문화재 당 보퉁 3명 이상의 전수교육 이수자를 두어야 하지만 이광구 선생의 공작선 이수자는 사위 1명에 불과하다.

이광구 선생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무형문화재 맥 잇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실제 이들 부부가 부채를 만들어 올리는 수입액이 1000여만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광구 선생은 사위가 부채를 배워보겠다고 내려왔지만 1년 동안 월급 한 푼 챙겨줄 수 있는 형편이 못돼 사위와 딸 볼 면목이 없었다면서 지금이라도 사위가 서천에서 안정적으로 직업을 갖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내려올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여의치 않아 고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후대에 길이 전승되어야 할 무형문화재가 후계자가 없어 맥이 끊긴다고 한다면 국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모두 국가 및 시도지정 무형문화재가 이수자나 전수조교를 두지 못하는 이유 등을 파악해 맞춤형 무형문화재 맥 잇기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광구 선생이 만든 공작선은 현재 한산 공예공방을 비롯해 서울 인사동, 이태원, 장안평, 남대문 공예품 시장 등지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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