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 / 김치바라기
모시장터 / 김치바라기
  • 박자양 칼럼위원
  • 승인 2019.10.09 21:58
  • 호수 97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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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밥상에 오르는 찬의 중심은 단연 김치다. 이 김치에도 계절 따라 매 년 반복되는 소위 메뉴사이클이 있다. 겨울 막바지의 잔설과 공기에 스민 연한 봄기운이 겹쳐질 즈음이면 김장김치가 슬슬 물리기 시작하고, 이 때 쯤 오마니는 봄동으로 - 어린 우리들은 이걸 봄똥이라 불렀다 - 풋풋하고 맛난 겉절이를 버무려내셨다. 이렇게 한 해 김치 시리즈는 시작된다. 햇쑥이 올라오고 민들레가 피면 돗나물과 알배추, 그리고 향긋한 미나리가 들어간 물김치가 나른한 봄 입맛을 깨운다. 봄과 여름 사이엔 지난 해 김장 때 담그신 밑지와 묵은지로 담백하고 맛 깊은 밥상을 차리셨고, 초여름 연한 열무로 담근 물김치와 열무에 엇갈이를 비슷한 비율로 버무린 전형적인 초여름 김치가 - 이것도 우린 그냥 열무김치라 불렀다 - 등장했다. 오이가 열리기 시작하는 절기가 오면 밑반찬으로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오이지를 먼저 담그시고 이어 틈틈이 오이소박이와 부추김치를 내셨다. 또 비슷한 절기에 등장하는 고구마순김치는 색다른 식감과 맛으로 우릴 밥도둑으로 만들었고, 아버지가 무척이나 좋아하시던 가지김치는 꽤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드셨다. 이어 초가을 한 철엔 잘 익은 양배추김치가 김장철 즈음까지 잠시 잠간 밥상을 드나들고, 여름 끝 무렵에 재배된 왜무가 장에 나오면 술지개미와 미강을 구해다 일본식 다꾸앙을 담기도 하셨다.

 

찬바람 불고 손이 시리기 시작하면 미나리에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드디어 김장철이 도래하는데, 이때가 바로 미나리김치를 담고 고들빼기김치가 막 맛 들기 시작할 때다. 지난한 수작업을 요하는 고들빼기김치 생각만 하면 오마니의 고부라진 허리가 다 이 김치 때문인 것만 같은 생각에 넌덜머리가 나지만, 그 맛이 일품인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릴 적 우리집 김장은 마늘과 생강의 향이 온 집안으로 스멀스멀 퍼지며 시작됐다. 이어 주재료인 배추와 무가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날부터 적어도 일주일은 걸렸던 것 같다. 김장은 우리가 총각김치라 불렀던 알타리무김치, 갓김치와 파김치를 먼저 담그신 후 배추를 절이며 본격적인 수순에 돌입한다. 배추 한 재료만으로도 짠지, 백김치, 여름김치, 겉절이 그리고 반지 등 다섯 가지의 김치가 만들어지고, 큰 무로는 작은 깍두기, 큰 깍두기, 밑지를 담고, 이어 배추와 무를 섞어 동치미가 만들어진다. 특히 할머니로부터 오마니에게로 전수된 우리집 특유의 반지가 김장의 화룡점정으로 가장 공들여 담으시던 김치다. 반지는 평양식 김치와 전주식 짠지의 특징을 적당히 혼합해 할머니 특유의 손맛이 곁들여진 창작물이다. 얼핏 보쌈김치와도 비슷한 다양한 부재료가 들어가나 그와는 또 다르게 반지는 남북을 섞어 버무려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담아 그 맛을 지키고자 하셨던 할머니의 지혜가 담긴 김치다. 이 반지 덕분에 한 겨울 밤참의 단골 메뉴인 평양냉면과 김치말이는 변함없는 맛을 유지한다. 반지 담기의 준비는 육수를 우리면서 시작된다. 꿩과 쇠고기 양지머리를 밤새 고와 육수를 내어 식힌 후 굳은 기름을 걷어내면 반지의 기본적인 국물 준비가 마무리 된다. 우린 솥 옆에 쭈글시구 앉아 입안에 고이는 침을 수시로 꿀꺽꿀꺽 삼키며 이제나 저제나 고기가 건져 올려지기를 학수고대하다 김이 오르는 수육접시를 받아 방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갓 버무린 김칫속을 얹어 먹던 그 수육의 맛 역시 김장과 연계된 신나는 추억으로 생생하다. 이 반지국물 우리는 방식은 후에 많이 변용되고 응용을 거쳐 간소해졌지만, 지금도 어릴 적 그 수육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반지의 김칫속으로 준비되는 재료 역시 일반김치와는 조금 다르다. 기본 속재료에 석이버섯, 생밤채, 실백, 실고추 등으로 시각효과를 돋우고, 낙지, 생갈치와 전복 등이 국물맛에 깊이를 더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집 김치 중 반지는 육해공군이 총동원되는 유일한 김치다. 힘 쓸 수 있는 남자 어른은 모두 동원되어 마당 한 구석에 김칫독이 줄지어 묻히고, 완성된 김치들이 함지박에 담긴 채로 김칫독을 향한 대장정을 마무리 하면 김장은 일단 끝이 난다. 허나, 연극무대에 막이 내려도 막후의 잔무는 끊임없듯 오마니는 후로도 몇날 며칠을 김장갈무리에 여념 없으셨다.

 

아직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8월의 시골은 일찍부터 김장준비로 술렁이기 시작한다. 밭을 뒤집어 거름을 넣고 이랑을 만드는 일과 함께 모종을 앉힌다. 이렇게 3주 정도가 지나 8월 말에서 9월 초순 이면 중부지방의 대부분 농촌에선 배추모종을 정식하고 무 파종도 거의 끝이 난다. 무릎이 부서져 여름 내내 활동반경이 집구석유람으로 제한된 채 이웃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처지로는 김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는 아련한 옛일의 회상이고, 개중에 음식은 또한 단연 으뜸이다. 먹거리의 다양성은 그를 지닌 집단의 역사와 문화의 깊이를 반영한다지 않는가. 더욱이 음식은 그와 연계된 따뜻한 기억들을 소환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우리집 김치종류만도 이 십여 가지가 넘으니 전국의 각 가정에 등장하는 김치는 또 얼마나 다양할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누그러지고 절로 군침 도는 김치 한 보시기와 이에 곁들여진 따뜻한 술 한 잔이 생각나는 서늘한 가을 저녁, 김치바라기 추억놀음이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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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2019-10-10 11:04:43
그저 퍼주기만 하던 어머니의 냄새
철철이 담아내던 땀의 결실이..
"맛있냐?" "응!맛있어!!"
고마움과 함께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