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9) 서산 심정순 명창
■ 기획취재/ 중고제 소리를 찾아서 (9) 서산 심정순 명창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9.10.17 01:48
  • 호수 9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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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에서 중고제 판소리 꽃피운 심씨 일가

선양사업 활발…국립 국악원 설립 추진하기도

중고제 판소리 명창 심정순((沈正淳 1873~1937)은 서산이 낳은 소리꾼으로 그의 조카 심상건, 아들 심재덕, 딸 심매향 심화영 모두 소리를 했으며 가수 심수봉은 심재덕의 딸이다. 뉴스서천 취재팀이 지난 920일 판소리 일가를 배출한 서산시를 방문해 심정순 명창과 그 일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갯마을 물산의 집산지 서산

고지도를 보면 서산지역의 충청 서해안의 해안선은 드나듦이 극심함을 알 수 있다. 북쪽으로 가로림만과 대호지만이, 남쪽으로는 천수만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수많은 갯마을을 이루고 있다. 서산은 이러한 갯마을 들의 중심에 자리잡은 도시이다.

▲가로림만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마을회관에 서있는 칠지도제작야철지기념비. 이곳에서 백제 근초고왕 때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를 제작한 유래를 적고 있다.
▲가로림만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마을회관에 서있는 칠지도제작야철지기념비. 이곳에서 백제 근초고왕 때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를 제작한 유래를 적고 있다.

 

가로림만이 남쪽으로 파고든 지곡면 도성리 마을에 가보았다. 도성리 마을회관 마당에 칠지도가 새겨진 빗돌이 놓여 있다. 칠지도란 백제의 전성기였던 근초고왕 때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칼로 일본의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도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칠지도는 백제의 수도(당시 한성)에서 물을 건너 7일 동안 가는 곡나(谷那)’라는 곳에서 만들었다 하는데 지곡(地谷)면이 바로 곡나이고 현재에도 지곡면 도성리 인근에 철산’, ‘철동이라는 지명이 있으며, 예로부터 야철 기술자들이 많았다고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칠지도를 만든 곳이 바로 이곳 가로림만이 깊숙이 육지로 파고든 지곡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로부터 이곳은 연안 항해의 주요 거점이었을 수 있을 것이다.

▲당진시 대호지면 조금리 마을 기념비. ‘남연군 도굴주범 오페르트 상륙 통상요구 나룻터’라고 적혀 있다.
▲당진시 대호지면 조금리 마을 기념비. ‘남연군 도굴주범 오페르트 상륙 통상요구 나룻터’라고 적혀 있다.

 

서산시와 당진시 사이에 있는 대호지만은 1985년 완공된 대호방조제로 육지가 되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당나라를 오가던 배가 출입하는 당진포가 있는 곳이다. 과거에는 번화했을 당진포는 쇠락해가는 한적한 농촌마을이다. 이곳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호지면 면사무소 소재지 조금리가 나온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리 마을비를 길가에 우뚝 세워놓았는데 남연군 묘 도굴 주범 오페르트가 이곳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다고 새겨져 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1868년 상단을 이끌고 와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해 유골을 볼모로 통상을 요구하려다 실패하고 물러간 자이다. 그가 이 사건 2년 전에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대호지만 역시 뱃길을 통한 통상의 주요 거점이었던 것이다.

천수만은 수억 마리 조기떼가 회유해 들어와 산란을 하던 곳이다. 천수만 끝자락보다 아래쪽에 도비산(都飛山)이 있다. 도비산 서쪽 사면 천수만이 바라보이는 곳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부석사가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경북 영주 부석사와 창건 설화가 완전 일치한다. 창건 연대는 서기 677년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승려 의상이 백제 땅에 와서 절을 세운 것은 민심을 다잡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비산 동쪽 사면에는 문화재 서산삼존마애불이 있다.

이같은 역사적 현상들을 돌이켜볼 때 서산은 물산이 풍부하고 많은 인구가 거주했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배경으로 예술문화를 꽃피웠고 중고제 판소리의 모태가 되었을 것이다.

아들, 손자까지 대 이어 중고제 판소리

▲중고제 판소리 명창 심정순
▲중고제 판소리 명창 심정순

심정순은 1873년 서산시 읍내동에서 아버지 심팔락의 3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농사를 짓다가 우연한 기회에 25세부터 판소리를 배웠는데 장고, 단소, 가야금, 등도 함께 익혔다 한다.

그는 1910년 서울 전통연희의 공연장이었던 장안사의 대표적인 간판 스타였다고 한다. 1911년 음반을 취입했으며 이 무렵 이해조는 그의 판소리를 각색해 옥중화’, ‘강상련’, ‘토의 간’, ‘연의 각과같은 신소설을 썼다 한다.

심정순은 일찍이 서울 생활을 하면서 이동백, 김창룡, 서산 출신의 춤꾼 한성준과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인지 소리도 김창룡의 소리와 비슷하다 한다. 중고제 명창들은 그 담백한 소리로 이북 지역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하는데 그 역시 경기 충청 뿐만 아니라 이북 지역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191434일자 <매일신보>에 심정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여러 광대 중에서도 가장 품행이 단정하고 순실하고 은공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정순을 첫째로 꼽을지라. 고향은 충청남도 서산이오 시골에서는 농업으로 지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십오세부터 단가와 률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조선지경에서 심정순이라 하면 대개 알게 되었더라. 단가에는 토끼타령, 춘향가와 기타 잡가요, 음곡에는 가야금, 양금, 단소 장도 등이니, 집안에 들어가서는 근검치산과 자질 교육에 열심 근면하고 밖에 나와서는 광대의 직업으로 여러 사람의 환영을 사는 것이 심정순의 특별한 장기라 하겠도다.

심정순은 그의 조카 심상건(형 심창래의 아들)에게 가야금과 판소리를 가르쳤다. 심상건은 가야금 산조의 명인으로 일제 때 가야금 산조 음반을 취입했으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해 한국 음악사에서도 기록될 만한 인물이다.

아들 심재덕은 가야금 풍류와 산조, 병창, 판소리, 해금, 거문고, 단소에 두루 능했다 한다. 딸 넷을 두었는데 막내딸이 가수 심수봉(본명 심민경)이다.

심정순의 딸 심매향은 1927년에 일찍 작고했으며, 심화영이 중고제 판소리의 전통을 이었다. 심화영은 191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과 온양을 오가며 자랐다 한다. 열 네살이 되던 해 큰 오빠 심재덕을 따라 서울로 가 1년간 이화학당에서 수학했으며 18살 무렵 서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큰오빠에게 본격적으로 악(), (), ()를 배우게 되면서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심화영은 2009년에 작고했다.

중고제 명창 선양사업 활발

심정순 기념비
▲서산문화원 앞에 있는 심정순 기념비

서산시 읍내동에 있는 서산문화원 앞 공원에는 중고제 판소리 명창 심정순의 예술세계를 기념하는 심정순 기념비가 있다. 서산시와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1993년에 건립했다. 기념비에는 그의 출생 및 약력, 가계, 음악 예술에 기여한 공로 등을 자세히 새겨 놓았다.

심정순 일가 외에도 서산시에서는 서산시가 배출한 해미의 고수관, 방만춘 등 판소리 명창들을 기리고 예술전통을 이어받는 문화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으며 홍주 결성 출신의 판소리 비조 최선달과 덕산의 내포 지역까지 아우르는 국립국악원 설립을 2013년도에 추진한 바 있다. 현재 국립국악원은 서울과 전북 남원, 전남 진도, 부산 등 네 곳에 있다.

<허정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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