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백제부흥운동 현장 서천 (1)백강 전투
■ 기획/백제부흥운동 현장 서천 (1)백강 전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0.03.11 18:11
  • 호수 9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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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판도 가른 ‘백강 전투’

위치 두고 설 ‘분분’…전투 현장은 어디?
▲삼국시대 당시 금강 하류지역 해안선(추정)
▲삼국시대 당시 금강 하류지역 해안선(추정)

6638월 금강하구에서 4개국이 참여한 국제 해전이 있었다. 660년 사비성 함락 이후 3년 동안 치열한 백제부흥운동을 펼쳐온 백제와 왜의 연합군과 신라와 당의 연합군 간의 전투였다. 이를 학계에서는 백강전투라 부르고 있다. 이 전투에서 제왜연합군이 나당연합군에 패함으로써 백제의 사직은 끊겼고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는 중국이 주도하게 되었다.

<일본서기>는 백강전투의 모습을 다음과 비교적 소상하게 같이 그리고 있다.

()의 장군이 전선 170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쳤다. 일본의 수군 중 처음에 온 자와 당의 수군과 대전했다.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 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 “일본의 제장과 백제의 왕이 기상을 보지 아니하고 우리가 선수를 쳐서 싸우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중군의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당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당은 좌우에서 군사를 내어 협격을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이 적에게 패했다.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며 수십인을 죽였다. 마침내 전사했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은 몇 사람과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피했다.

<삼국사기>에는 백강구에서 왜인을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배400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붉었다고 기록했다. 이날이 827일의 일이었다.

모두 네 차례의 접전이 있었지만 제왜연합군은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첫째, <일본서기>에서 보듯 날씨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화공과 직결되는 풍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했는데 이는 썰물을 만나 배를 움직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의 배들은 거친 풍랑을 가르며 항해하기에 유리한 첨저선이었다. 이는 수심이 얕은 금강 하구에서 썰물을 만나 뱃머리를 돌리기에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같은 참패에는 제왜연합군이 당의 수군을 과소평가한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나당군의 전선은 170척인 데 비해 제왜연합군은 400척 이상이었다. 백강전투의 참화를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병화로 인해 즐비하던 가옥은 황폐하고 썩지 않은 시체는 풀더미와 같았다.(兵火之餘 比屋凋殘 屍如莽)”

제왜연합군이 패하자 당의 수군을 이끄는 유인궤와 육군을 이끄는 신라의 김법민은 수륙병진책으로 백제의 임시 왕도였던 주류성 공격에 나섰으며 97일 마침내 주류성이 함락됐다.

이렇듯 동아시아의 판도를 가른 중요한 전투였음에도 백강의 위치를 두고 설이 분분하다. 금강하구 지역이 백강이라는 주장과 전북 부안의 동진강설, 충남 연기의 안성천 백석포설 등이 있으며 부안 동진강설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KBS의 교양 프로그램 역사 스페셜에서도 부안 동진강이라고 단정한 바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기벌포가 바로 백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벌포를 장암 또는 손량, 다른 한편으로는 지화포 또는 백강이라고 하고, 백강을 기벌포라고 한다.(伎伐浦 卽長巖,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白江 卽伎伐浦)”

당시 제왜연합군의 목적은 사비성 수복에 있었다. 누가 사령관이더라도 아무런 지리적 의미가 없는 동진강을 통해 사비성으로 진격하려 하지 않았을 것임은 상식이다.

백강이 금강 하구임은 <삼국사기> 무령왕 원년조에 뚜렷이 나와 있다. <삼국사기>를 살펴본다.

11,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락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죽으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十一月, 獵於 熊川北原, 又田於<泗沘>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 王以<苩加{芍加}><加林城>, <>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 怨王. 至是, 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諡曰 東城王)<삼국사기 동성왕 23년조>“

동성왕 2311월에 동성왕은 사비성 서쪽 벌판에서 사냥을 했다. 당시의 사냥이란 토끼나 멧돼지를 잡는 사냥보다는 군사기동훈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때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 묵었다. 마포촌은 오늘의 서천군 마산면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림성주 백가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12월에 이르러 사망했다.(至十二月乃薨) 이어 동성왕의 아들 무녕왕이 대를 이었는데 백가가 가림성(오늘의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에 근거해 계속 반란을 일으키므로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오늘의 서천군 한산면)으로 가서 토벌에 나서니 백가가 성에서 나와 항복을 했다. 이에 왕이 백가를 참해 백강에 버렸다.(投於白江)

아래는 삼국사기 원문과 그 번역이다. 苩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백가가 출항하니 왕이 참지하여 투어백강이라.)이라고 나온다. 백강이 동진강이라면 시체를 떠메고 금강을 건너고 만경강을 건너 동진강까지 가서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산에서 가장 가까운 금강 하류가 바로 백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武寧王 諱 斯摩(斯麻 或云 隆) 牟大王之第二子也. 身長八尺, 眉目如畵, 仁慈寬厚, 民心歸附, <牟大>在位二十三年薨, 卽位. 春正月, 佐平<苩加{芍加}><加林城>, 王帥兵馬, <牛頭城>, 命扞率<解明>討之. <苩加{芍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혹은 융이라고도 한다.]이니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명을 시켜 공격하게 했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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