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 / 꿈은 노력을 잡아먹어야 꽃 핀다
■ 송우영의 고전산책 / 꿈은 노력을 잡아먹어야 꽃 핀다
  • 송우영
  • 승인 2020.03.18 18:14
  • 호수 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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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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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인욕遏人慾 존천리存天理라 했다.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은 막고 하늘의 뜻은 붙잡는다는 말이다. 이 말을 다산은 목민심서 권8 봉공육조奉公六條 2 수법守法편에서 이렇게 주석을 단다.

확실하게 지킬 것을 지켜<확연지수確然持守> 흔들리지도 않고 빼앗기지도 않으면<불요불탈不撓不奪> 즉시로 인욕은 물러나고<편시인욕퇴청便是人慾退廳> 천리는 흐르게 될 것이다<천리유행天理流行>”

이보다 훨씬 이전에 이것을 생활에 실천한 인물이 세종 때 명재상을 지낸 정승 경암敬菴 허조許稠이다. 그의 연보와 성현成俔의 필기잡록류筆記雜錄類 용재총화慵齋叢話따르면 7세 때 훤당萱堂 염정수廉廷秀에게서 소학 대학 중용을 읽고, 1383년 우왕 913세 때 진사시를 거쳐 양촌陽村 권근權近에게서 사서와 근사록을 수학하면서 138515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0년 공양왕 220세 때 식년문과에 급제해 전의시승典儀寺丞으로 출사를 시작한 정승 허조는 전주판관全州判官 재임 시절에 스스로 다짐을 대련으로 써서 동헌東軒에 걸어놓았는데 비법단사非法斷事 황천강벌皇天降罰이 그것이다. 불법으로 일을 처리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말이다.

백성들은 이런 허조를 일러 철태수鐵太守 쇠부처鐵浮屠라는 미칭으로 불렀다. 허조는 재상을 지낸 기간이 불과 2년 남짓이다. 그럼에도 사가들은 허조가 단 2년 정승 직에 있었지만 그를 세종시대를 빛낸 정승으로 손꼽는 데에 이견이 없다. 그만큼 사와 욕의 다스림이 훌륭했다는 말이다.

인간사에서 지위고하를 무론하고 사와 욕둘 중에 하나만이라도 잘못 다스린다면 멸문의 화가 멀지 않았음이다. 서거정徐居正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허조의 외모를 기록해 놨는데 척추는 굽었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은 마를 대로 말랐으며, 그의 공부법은 아침에 첫닭이 울면 일어나 앉아서 소학小學과 중용中庸을 읽었는데 그러하기를 날마다 했고, 늘 쪽잠을 잤으며 한 밤중이라도 잠시만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책을 읽는 편수독공片睡篤工이다. 이러한 공부법은 주자에게서 비롯되는데 주자는 일생을 공부에 시달려(?) 잠 한번 맘 편히 못 잔 편수학인片睡學人의 비조鼻祖가 된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공부한 사람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다. 퇴계 이황 같은 선비는 집안에 노비가 367명이요 소유한 전답이 약 363542평으로 굳이 치열하게 공부 안 해도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공부하느라 그런 것(?)에는 관심 둘 틈이 없었다 한다. 우암의 경우도 그렇다. 일찍이 정조는 우리 동방의 송선정宋先正은 바로 송나라의 주부자朱夫子이다라고 추숭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우암 송시열은 평생을 주자를 본받는 것으로 일생을 소진했는데 주자처럼 늘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글을 읽었다 전한다.

후대에 와서 쪽잠을 자면서 글을 읽은 이를 꼽으라면 단연 후광 김대중이 으뜸이다. 어려서 봉람재서당(훗날 덕봉강당으로 바뀜)에서 잠자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쪽잠을 자가면서 소학을 읽은 후광은 후일 대통령이 되고서도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공부하는 습관 때문에 청와대 비서나 참모진들이 무척 애를 먹었다 전한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치열하게 공부들을 하는가.

조선 영조 때의 평민 출신 가인歌人으로 숙종 때 이르러 겨우 포도청 포교捕校를 지낸 남파南派 김천택金天澤이 그의 시에서 밝혔듯이 확전성소미발擴前聖所未發이다. 즉 먼저 태어난 성인이 아직 밝히지 못한 바를 밝혀서 넓히고자 하는 학구열 때문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공부한 이가 또 있으니 아호雅號를 덕암德巖으로 하고 자를 여해汝諧라하는 충무공 이순신이다. 그는 평생을 아호雅號보다는 를 많이 썼는데 자는 성인식 때 스승이 지어주는 것이 관례인데 이례적으로 그의 모친 초계변씨草溪卞氏서경書經에 나오는 순임금의 오직 너라야 세상이 화평케되리라는 문장에서 집자한 것이라 한다. 이순신의 아버지는 비록 가문은 빈한했지만 학문은 꽤 깊었다. 아내인 초계변씨가 아들의 를 서경을 근거해서 지어주었다는 것은 초계변씨의 학문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조선 유일의 모친이 자식의 를 지어준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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