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우리고장 출신 애국계몽운동가 송당 김성희(松堂 金成喜)②
■ 특집 / 우리고장 출신 애국계몽운동가 송당 김성희(松堂 金成喜)②
  • 박수환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위원
  • 승인 2020.06.08 11:34
  • 호수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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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화론 기반 둔 ‘선자강 후독립’ 주장

대한자강회·대한협회 회원으로 사회 활동

지난호에서는 구한말 일본으로부터 빌린 1300만원의 국채를 전국민이 자발적 모금을 통하여 상환하자는 운동에 전국적 조직인 국채보상기성회(國債補償期成會)를 조직을 송당 김성희(松堂 金成喜)의 활동상황을 알아보았다. 일제의 조직적 방해로 결과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지만,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실력 양성을 통하여 국권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송당 김성희(金成喜)는 이러한 국권의 수호를 위하여 정치, 사회단체에 참여하고 학교의 교육 통해 국민들의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매일신보 1925년 7월 31일자에 실린 김성희의 부음 기사
▲매일신보 1925년 7월 31일자에 실린 김성희의 부음 기사

애국계몽운동가 송당 김성희(金成喜)1847814일생으로 부친 김노규(金魯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호적으로는 당초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149번지였으나 흥림저수지 조성공사로 수몰되는 관계로 지석리228번지로 이거하였고, 1925721일 사망 후, 장남 김상찬(金商燦)은 판교면 현암리로 전적하고 거주지를 옮겼다.

1893년 교보통상사무아문 주사(9)의 공직을 시작으로 18959월 홍주부 주사를, 경북 관찰부 주사, 1902년부터 다음해 5월까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3)역임하였고, 19071월 한성덕어학교(독일어) 부교관으로, 19075월에는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자강회 및 대한협회 회원으로 사회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사회활동하면서 협회월간지에 애국계몽운동에 따른 30여건의 논설을 남겼다. 송당 김성희는 각종 논설을 통하여 당시 시대를 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보고, 우승열패, 약육강식의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국권을 상실하여 보호국 상태에 처한 원인은, 외국의 침략 때문만이 아니라 실력양성, 자강실현에 힘쓰지 않는 한국 자체에 있다는 자기반성의 입장에서, 실력의 부족으로 상실된 국권의 회복, 독립의 실현은 실력의 양성, 자강의 실현에서 가능하다는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선자강(先自强) 후독립(後獨立)론을 주장하였다.

아무리 기회가 있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하므로 먼저 실력을 양성하여 장차 독립의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였다. 첫째로 교육진흥에 의한 실력양성론 폈다. 국가의 독립은 오직 자강(自强) 여하에 있을 뿐이며 자강의 방법은 국민 교육을 통하여 실력을 쌓고, 산업을 진흥시켜 국가가 부강해져야 한다며 교육자강론을 주장하였다. 학교 교육은 물론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성교육과 의무교육 및 노동야학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둘째로 식산흥업(殖産興業)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국권회복은 농공상업의 발달에 있고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민으로 전락된 주요원인은 식산의 부진에 따른 국가의 빈약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셋째로 정치개혁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건의문 관련 문서
▲건의문 관련 문서

지배자가 국가를 사유(私有)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 등 민권보장이 불가능하여 백성의 힘이 쇠잔해지고, 국민에 대한 정치참여를 불허하여 국민이 국가의 일을 남의 일보듯이 하므로 애국심이 생길 수 없고, 국민에 대한 가혹한 압제와 수탈로 국민의 생산의욕이 감퇴되어 산업이 피폐해지고 국력이 쇠퇴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정치발전은 국민교육에 달렸다고 주장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하여 무단통치로 통제하고 반민주적인 방법으로 인권탄압을 더욱 강화하자 191931일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많은 인사가 구속되며 피해가 극심해지자 송당 김성희(金成喜)는 조선총독부에 12가지의 의견서를 만들어 시정해 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건의서 기록이다,

 

나는 구한국민의 한사람입니다. 73세의 노인으로 죽을 날이 가까워지고 있고 지금 미충하지만 한 마디의 건의함으로 다른 날을 기대합니다. 현재 학생계에 예사롭지 않은 소요가 발발한다고 합니다. 전에 교육자였던 자신으로서는 안심하기 전에 조선인 학생의 활동적인 성질과 일본정치의 평원平元적 처치에 대해 12가지의 의견을 말합니다. 저 국민의 정치 사상은 즉시 독립을 구조 보전하는 것입니다. 근세 동서각국의 국민은 헌법 하에 활동하고 입법권, 자치권과 같은 참정의 기관을 이용, 분명의 복리를 누려야 하는 것은 모든 다 아는 바입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 사상으로 국민의 자격을 없애고 국가를 포기하고 사람의 도를 멸절시키는 것은 백만 인이 있어도 국가에 어찌 이롭고, 통치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비록 국민의 권리 사상은 사실이지만 어떤 이는 정부에 대해 얕은 지혜로 격렬하게 논쟁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열심히 애절하게 고소의 정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전자는 옛 영국 중세기에 여러 번 나타나는 일이고 후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분리 시 때의 현상입니다. 이를 총괄해서 말하자면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앞장서서 소요를 일으켜 정치 사상을 알게 하고 이 정의 애절하게 하소연하고 마치 굶주린 자의 음식을 구하는 것과 같이 지금 어린 아이가(미성숙한 아동) 음식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적당히 경계하여 타일러 서서히 멈추게 하고 슬프게 울며 벽 구석에 이를 숨어서 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조선인의 정치적 사상은 무엇보다 유래가 있다. 공자가 말하길 천하평[天下平]하다. 또 말하기를 천하국가는 균일하다. 공자가 말하길, 적은 것을 근심하고 균일치 못한 것을 근심하고 가난한 것을 근심하고 편안하지 않을 것을 근심하고 편안하지 않고 균일하지 않으면 천하가 안녕하지 않음은 당연합니다. 통치권을 가지고서 천하를 평안하고, 균일하지 않은 것은 법률의 집행을 균일하게 교육의 시설을 동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평의 종자를 융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서인의 타 종족 식민지에 압력으로 이와 같이 불평등의 조치를 했다면 장차 동화되지 못할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조선인의 성질은 역사의 관념, 풍속습관을 4천년 전래이고 물론 도덕성 재식성에도 결여, 인내성 결여이기 때문에 동기를 이용도를 넘어 생명상의 해를 볼 뿐 아니라 후일에 이 같은 행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특히 동화책 억압을 한다면 일본 정부의 명예상 누가 되고 정의 인도상 정당한 행동으로 진화, 오늘날과 같이 애절하게 호소하오니 인자 군자의 마음으로 이 억압을 오늘날 적당한 처치방법을 연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송당 김성희(金成喜)는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하다가 1925721일 향연 78세 나이로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 자택에서 졸하였다. 묘소는 판교면 현암리에 있다.

송당 김성희 선생이 사용하던 인장
송당 김성희 선생이 사용하던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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