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사람으로 살기’
‘서천사람으로 살기’
  • 공금란
  • 승인 2003.12.26 00:00
  • 호수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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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봉에 화살을 꽂는 사람, KAL758기에서 살아 여기까지……
서천에 자리잡은지 1년이 넘지 않았지만, 서천의 풍경 속에서 서천 사람으로 살기에 힘을 기울이는 이가 있다.
주인공은 문산면 은곡리에 48세의 나이에 제 2의 고향을 만드는 김용섭 씨다.
“가족 모두의 연탄가스 중독, 물놀이 사고 또 그 유명한 KAL858기, 김현희 사건 속에서 극적으로 살아나 죽음을 초월했다”는 용섭 씨의 고백은 ‘盡人事待天命’명이라는 글귀를 접객 실에 걸어 놓은 뜻에 공감하게 한다.
그 일로 8년 동안 사우디와 이라크의 해외건설 현장에서 청춘을 바쳤지만, 급작스런 동료의 죽음 뒤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의 승용차 운전석 옆자리에는 아직도 동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16년 전 자신의 운명을 대신해 희생당한 동료가 대한항공 기내에서 덮고 있던 담요를 싣고 다닌다.
“저는 남보다 두 배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란 말로 바그다드에서 귀국할 당시 자신이 타야했던 비행기표였지만, 용섭 씨의 사정으로 기꺼이 귀국일정을 바꿔주고 KAL858기에 탑승해 운명을 달리한 동료에 대한 회한이 그를 한적한 산골짜기로 들어오게 했나 싶다.
김포가 고향인 용섭씨 부부, 그들이 서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한때 공주시에서 일을 하면서 느낀 충청도 인심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는 고향에서 벼농사 과수농사를 했고 서울, 인천 등지에서 식당을 운영하다가 오래 전 ‘꼭 충청도에서 살아보리라’했던 꿈을 저버리지 않고 이룬 것이다.
‘귀곡산장’이라 불릴 만큼 음산한 폐가를 인수해 본체를, 조립식으로 건물을 지어 접객실을 꾸미고 손님들이 기다리면서 한시 한 구절씩 음미할 수 있도록 벽면은 온통 글귀들로 채웠다.
그가 경영하는 식당의 주 메뉴는 대나무통 오리구이다. “요즘 극성을 부리는 조류독감 때문에 평소 5팀 정도 찾았는데 3팀 정도로 줄었어요”라 말하는 부인 이효순 씨(45세), 걱정도 되련마는 얼굴에 구김이라고는 없다. 남편과 함께 죽음을 초월해서 인지, 맑은 바람과 푸른 솔의 영향인지 태연하기만 하다.
머슴이라 자처하는 김용섭 씨의 접대를 받으며 그의 아내가 요리한 오리구이를 먹고 그 불펜에 맛깔스럽게 밥을 비벼 허기를 채우고 나면 해야할 일이 많다.
우선 30M, 70M. 145M의 과녁을 향해 활을 당긴다. 하루에 백여 발을 쏜다는 용섭 씨의 교습으로 시위를 당기고 과녁을 향해 순발력 있게 활을 쏘면 시름이 함께 날아가 버린다. 또 해동검도 공인 4단인 용섭 씨는 손님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검도의 기본동작으로 대나무가 산산조각 나는 쾌감을 맛보게 한다. 게다가 “소원을 말하고 가볍게 세 번 치세요. 당신의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써있는 북을 두드리면 금방 로또복권이라도 당첨 될 것같이 마음이 즐거워진다.
그는 세상살이에서 허기지고 지쳐 찾아오는 모든 이의 소원이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입구에 주위 돌들을 모아 기원탑도 세웠다. 그 탑에 자신들의 거처를 늘 푸른 대나무란 뜻을 담고 있는 ‘호죽원’이라 칭하고 ‘여기오신 모든 분들 꿈을 이루소서’ 하는 기원과 고3이 되는 무남독녀 윤희의 안녕을 빌고 있다.
낮에는 손님을 기다리며 인근 산에 올라 땔감을 준비하고 밤에는 별과 더불어 지낸다는 용섭 씨는 “내가 냉이 많은 곳을 알아놨으니 있다가 캐다가 손님상 올리자”고 아내에게 속삭인다.
아내 효순 씨는 “우리가 아직 이 지역에 좋은 일 한 것도 없어 부끄럽다”며 극구 사진 한 장 찍기를 마다했다.
“초기에 우리를 오해한 사람들이 찾아와 고충이 있었지만 알고 보니 모두 순박한 사람들이었다”는 용섭 씨 내외는 이제 막 서천인으로 살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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