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경성부청·조선신궁·조선은행·종로경찰서’ 동시 폭파 기도
‘조선총독부·경성부청·조선신궁·조선은행·종로경찰서’ 동시 폭파 기도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0.08.14 02:37
  • 호수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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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특집] 서천사람 정원득, 흥림저수지 축조 다이너마이트 빼돌려 폭탄제조 도와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고 이 땅을 지배한지 16년이 지난 19261월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 지배의 주요기관을 동시다발적으로 폭파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여기에 저수지 축조 발파공으로 일하던 서천군 종천면 출신의 정원득이 다이너마이트를 빼돌려 폭탄제조를 가능케 했다. 비록 거사 직전에 일경에 붙잡혀 실패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이었다. 광복 75주년을 맞아 이 사건의 전말을 알아본다. <편집자>

▲창의단 사건 재판 결과를 보도한 1927년 6월 18일자 매일신보
▲창의단 사건 재판 결과를 보도한 1927년 6월 18일자 매일신보

정원득은 1896년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일제는 조선의 쌀을 빼돌리기 위해 1917년 공유수면매립법을 만든 후 간척사업에 주력했는데 이 때 금강하구의 간석지를 논으로 개간하고 여기에 용수를 공급할 저수지 축조에 나섰다. 이 저수지가 오늘의 봉선저수지와 흥림저수지이다.

정원득은 1925년에 착공한 흥림저수지 축조 현장에서 다이너마이트로 암반을 폭파하는 역할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19259월 어느날 청주에 사는 그의 손위 처남인 김응선이 찾아왔다. 김응선(1883~1944)은 충북 옥천군 이남면 강청리에 살고 있었으며 그의 동지인 동향의 전좌한(1899~1986)과 함께 창의단 단원으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창의단(倡義團)1919년 이범윤(李範允)의 부하인 이범모(李範模)가 조직한 항일무력투쟁 단체로 러시아, 북만주, 연해주, 함경북도 무산 일대를 세력권으로 하고 있었으며 1000여명의 단원이 있었다. 단장에 이범모, 역원(役員)에 김내언·강두황·박인섭 등이 임명되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고, 첫 해 11월 당시 모금된 액수는 3150()이었다 한다.

김응선과 전좌한은 창의단의 거사 계획에 따라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동시에 폭파하기로 하고 방법을 찾던중 매제인 정원득을 찾아온 것이다.매제인 정원득이 공사장에서 발파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고 다이너마이트를 빼돌리기 위함이었다.

정원득은 김응선의 뜻에 따라 발파작업이 있는 날이면 몰래 다이나마이트를 빼돌렸다. 다이너마이트 10, 뇌관 10, 도화선 15척이 확보됐다.

옥천의 전좌한은 자신이 직접 고안한 도안을 가지고 옥천읍에서 유기그릇을 만들어 파는 배석규를 찾아가 놋쇠제 용기 5개를 주문했다. 놋쇠제 용기는 사제폭탄의 표피로 10월말경 전좌한에게 인도되었다.

김응선은 전좌한의 집 골방에서 폭탄 6개를 제작 완료하고 옥천군 이원면과 금산군의 경계에 있는 진위산 속에서 폭발 실험을 했는데 그 위력이 예상 외로 컸다. 김응선은 이를 창의단에 보고했다. 창의단은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목표로 정했다. 폭파에 가담할 단원들이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오기 어려우므로 국내에서 이를 확보키로 했다. 이들은 경성으로 무기를 반입하는 일, 거사에 가담할 단원의 확보 등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1926127일 창의단으로부터 거사 자금이 오자 전좌한은 먼저 상경해 만주에서 활동하던 창의단 단원 계의산을 만나 거사를 준비했다.

한편 김응선은 같은 마을에 사는 송암우, 정명옥, 김운용 등을 경성 구경을 시켜준다고 포섭해 128일 옥천 이원역을 출발해 그날 밤 용산역에 도착 계의산의 마중을 받았다.

다음날 시내구경을 시켜준다며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실지로 답사하고 청진동 진일여관에 투숙했다. 이튿날 또다시 폭파 장소를 재확인한 뒤 광화문 중국요리점 광흥원에서 최후의 기념 회식을 마친 후 계의산은 일행에게 계획을 말했다. 거사일을 다음날인 131일 새벽으로 정하고 숙소인 진일여관으로 돌아왔다.

계의산과 김응선이 밖에 있던 전좌한을 만난다며 나가자 일제 헌병대가 이들의 숙소를 급습했다. 송암우, 김운용, 정명옥 등이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계의산과 김응선은 만주 봉천으로 도주했다. 전좌한은 거사 계획이 탄로났음을 알고 매제 신화수 집 골방으로 피해 4개월을 은신하며 지냈다. 창의단의 폭파 계획은 불행히도 거사 직전에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정원득과 김응선은 다시 서울의 관공서를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중국 봉천으로 건너가 창의단 조직을 재건한 후 국내에서 활동하다 19267월 경기도경찰부에 체포됐다. 정원득은 징역 4, 김응선은 징역 4년을 받았다.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김응선은 애국장을, 정원득은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후손이나 친척들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창의단 조선총독부 등 폭파사건 재판 기록
▲창의단 조선총독부 등 폭파사건 재판 기록
▲창의단 조선총독부 등 폭파사건 재판 기록
▲창의단 조선총독부 등 폭파사건 재판 기록

이 글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박수환 전 한산면장이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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