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남기고 떠난 시 “아내의 채소밭”
남편이 남기고 떠난 시 “아내의 채소밭”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4.01.02 00:00
  • 호수 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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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 노래하고 장터에서 노래하는
세상이 온통 얼어붙은 엄동설한에도 기산면 원길리, 백연옥 씨의 채소밭은 아직 푸르다.
꽝꽝나무, 호랑가시아, 쥐똥나무……아담한 양옥집 주위에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상추, 배추, 시금치… 빼곡한 채소밭의 두렁을 대신하며 구획정리를 하고 섰다. 정원수는 남편이 심은 것들로 연옥 씨가 틈틈이 가꾸고 다듬고 있단다.

12월 27일 서천 장날, 연옥 씨의 빈집을 추위에 몸사리는 채소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니 서천사거리 어느 금은방 앞, 그 자리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겠다.

거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먹고살던 집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육신밖에 없는 남편을 맞아, 결혼 직후부터 시작된 서천, 장항, 한산 시장의 채소장사가 생활의 주가 되었다.

어려운 살림에 방랑벽이 있어서일까, 전국 절간을 돌며 목수 일을 하던 남편은 결국 해외로까지 나가 삼남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서야 집에 안주했다. 게다가 가슴에 무얼 그렇게 쌓아놓고 살았는지 삶의 굽이굽이마다 시로 토해내 「자운영 밭에서」와「기쁨보다 화려한 슬픔」 2권의 시집을 남기고 떠났다.

백연옥, 서천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더 이상 세상에서 할 일이 없으니 이제 점을 찍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더니 일찍이 딴 세상 사람이 된 시인 박우신, 그 떠나는 길에 “당신이 그토록 가고 싶어한 곳이니 편히 보내드립니다”했던 그의 아내가 연옥 씨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서 직접 길러 온 것들이라 맛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다. 서천 사거리의 노점들이 즐비한 틈에 연옥 씨와 그녀의 밭에서 옮겨진 채소들이 행인들의 발길을 잡고 있다.

365일, 몇 날이나 곤한 몸을 쉬었을까, 날마다 채소밭을 가꾸고 또 그 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며 삼남매를 길러 냈다.

“다음 달이 시집간 큰딸아이 해산이라 당분간 장사 못해요. 쉰 셋 나이에 할머니가 돼요” 마냥 기뻐하며 채소 담은 함박만큼이나 큰 웃음을 짓는다. 동지섣달 추위, 궂은 여름 소나기 아랑곳없이 다 감수하며 고생한 사람의 얼굴이지만 곱기만 하다.

연옥 씨가 이렇게 채소장사를 시작한지 20여 년, 남편이 집을 떠나 있을 때는 아이들과 먹고살 일이 막막해서 부끄럼도 모르고 시작했으나, 남편이 돌아오고 살림이 넉넉해졌을 때에도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창피하다고 나무라던 남편, 그러나 아내 연옥 씨의 희생적인 삶이 있었기에 현재의 삼남매와 더불어 따뜻한 가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 기꺼이 수용하고 아내를 위해 시를 남겼다.

아내의 채소밭

3, 8, 13, 18, 23, 28

속 덜 찬 배추 황토 묻은 무
깻잎 호박잎 고추 마늘 가지 오이
더러는 낡은 보자기에 싸이고
볏짚에 묶여 간다.

미루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폭염 속
마당이 갈라지는 가뭄 속의 수확은
아내의 얼굴에 웃음이 있고
잔주름 사이 번지는 땀이 있다.

숨이 차오른다.
일터에서 달려온 약속 시간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만만한 아내
버럭 소리를 지르지만 못 들은 척하는 여인네.

고개를 두 개 넘고 철길을 세 번 건너 도착되는 닷새 장터
그 길을 말없이 가는 내 곁에 앉아 하우스 걱정 가뭄 걱정
다음 씨 뿌릴 걱정 고장난 분무기 걱정
아내의 가슴속엔 채소밭이 가득 성가신 잡초도 자란다.

어떤 날은 ‘사랑을 그대 품안에’가 끝나도록
밭에 나가 물을 주고 있기에 소리질렀다.
배암 물리면 나 홀애비 되느만,
사람들은 모르리 시장에 나온 채소와 아내, 황토밭을…

남편이 시를 쓴 것처럼 연옥 씨도 시를 쓴다. 현재 서천주부독서회의 왕언니 ‘화 한번 내는 일 없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회원들을 대하는 큰언니 같다’는 게 한결같은 평이다.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53세로 회원들이 정신적으로 의지를 많이 한단다.

이 모임에서 펴낸 문집 「세모시」에 실린 그녀의 시에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이 흐른다. 연옥 씨 주의사람들은 말한다. 천상 우리네 고운 아내이고 아들 하나, 딸 둘에게는 그야말로 강한 어머니라고.

맏이 아들 웅구는 대학과 군 복무를 마쳐 직장에 다니고 큰딸 지영도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 좋은 배필을 만나 예쁜가정을 이루어가고 막내딸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이제 고단한 채소 노점상을 접을 수도 있으련마는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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