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김옥균 여동생 김균 판교에서 살았다(1)
■ 특집 / 김옥균 여동생 김균 판교에서 살았다(1)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1.27 16:11
  • 호수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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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실패 후 일가족 몰살…세상 이목 속이고 살아남은 여동생 김균

1940년 8월 매일신보 “고 김옥균씨 친매 발견 서천군하에 생존중” 알려
▲판교면 판교리 237-1번지에 있는 김균 여사가 살던 집. 초가에서 지붕만 뀌었을 뿐 옛 건물 그대로 남아있다. 집을 찾아낸 박수환 전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사료위원이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윤길자씨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판교면 판교리 237-1번지에 있는 김균 여사가 살던 집. 초가에서 지붕만 바뀌었을 뿐 옛 건물 그대로 남아있다. 집을 찾아낸 박수환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사료위원이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윤길자씨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갑신정변과 김옥균

,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갑신정변의 주역 고균 김옥균의 묘비명이다. 박영효가 지었다고도 하고 유길준이 지었다고도 한다.

김옥균(金玉均)1851223일에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9대손 안동김씨 김병태(金炳台)와 부인 은진송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하여 이름을 옥균이라 지었다고 한다.

김옥균은 일곱 살 때 천안에 사는 당숙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병기는 광주목사를 지낸 김교근(金喬根)의 아들이며, 대사헌 김병규(金炳奎)의 동생이다. 영의정 김좌근의 양아들로 1865(고종 2)년 병조판서·좌찬성, 1866년 공조판서·예조판서, 1867년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던 김병기(金炳冀)와는 같은 안동김씨이지만 다른 인물이다.

양부 김병기(金炳基)1846년 소과(小科)에 합격했으나 문과급제를 못하고 음직으로 1852(철종 3) 광릉참봉을 지냈으며 1856년 옥과 현감을 시작으로 1859년 금성현령, 1865년 옥천군수를 거쳐 1868년 양양부사, 1877년 마전군수, 1880년 강릉부사를 역임하고 18846월까지 가평현감을 지내는 등 주로 외직을 담당했다.

1883년 정3품 통정대부에 가자되었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부호군(副護軍)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 후 김옥균의 양부라는 죄명으로 삭탈관직되었다.

갑신정변은 1884124일 오후 6시 정동에 새로 신축한 우정국 준공 축하연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개화파가 자신들의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윤태준, 한규직, 민태호, 민영목 등 민씨 일파의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정변이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세 사람은 고종을 만나 우정국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과 그 원인이 수구 세력에게 있음을 알리고 경우궁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고종이 경우궁으로 가자 일본군이 외곽을 지켰다. 다음 날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 홍영식을 좌의정으로 한 새 내각이 조직되었다. 김옥균은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 참판을 맡아 국가 재정을 장악하고, 126일 혁신정강을 공포했다.

민씨 정권 측은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주둔군에 도움을 요청했고, 126일 오후 3시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투입해 들어옴으로써 개화파의 거사는 3일 만에 진압되었다. 청군을 막을 일본군은 소수에 불과했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지원 약속을 어겼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개혁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된 원인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 지성인들의 거사가 지닌 한계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김옥균 여동생 김균

▲김균의 생존 사실을 알린 매일신보 1940년 매일신보 8월 14일자 기사
▲김균의 생존 사실을 알린 매일신보 1940년 매일신보 8월 14일자 기사

갑신정변의 실패로 김옥균의 가문은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양부 김병기는 부자간의 인연을 끊은 점을 감안 삭탈관직에 그쳤지만 생부 김병태(金炳台)와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체포되어 감옥에서 옥사하고, 어머니와 두 살 아래 여동생 김균(金均)은 음독 자살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아내 정경부인 기계 유씨 유치상(兪致庠)의 딸과 김옥균의 딸은 살아남았으나 관노가 되고 만다.

그러나 김균은 살아남아 판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40814일자 매일신보는 고 김옥균씨의 친매를 발견 서천군하에 생존중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김옥균의 여동생 김균이 서천군 판교에 살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전한 매일신보 기사를 살펴본다.

3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개화당의 거두 김옥균씨의 매씨가 충남 서천에서 돌연히 나타나게 되어 고 김옥균씨를 추모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감회를 깊게 하였다. 그 매씨는 충남 서천군 동면 판교리 237번지에 사는 김균 여사로 현재 맏아드님인 송돈헌(宋敦憲)씨 부처에게 의지하여 극빈한 생활로 근근히 지내는 중이라는데 김균 여사는 노쇠하여 눈이 어둡고 말도 잘 하지 못하는 터로 소관 주재소 순사가 호구조사를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구한국시대 풍운이 험악하여 김옥균씨가 내지로 망명을 가게 되자 김여사는 죽은 것 같이 꾸며가지고 거짓 장사까지 지낸 다음 산송장 노릇을 하며 충남 경남북 등지로 전전하면서 아들 내외에게 의지하고 지내오던 차 어느날 우연히 동네 사람들과 지나간 옛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신상에 대한 말을 한 것이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이어서 순사가 호구조사를 갔다가 그 소문을 듣고 진상이 판명된 것이라 한다.

이 기사는 매일신보 대전지사의 유일지 기자가 서울 본사에 전화로 보고한 내용을 기사화 한 것이다. 이튿날인 815일자에는 유일지 기자가 직접 작성한 기사가 실렸다.

유 기자는 웅지대략을 몸소 마음대로 펴지 못하고 철천의 유한을 품은 채 애처로운 일생을 끝맺은 한말지사 고균(김옥균의 호) 선생의 실매가 나타난 경로를 소개하는 것도 또한 고인을 추모하는 의의 깊은 기념이 될 것이라며 판교 김균 여사의 집을 방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사화 했다.

경남철도 판교역에서 내려 주재소 옆을 끼고 약 3정 가량 들어가면 산곡 사이에 겨우 풍우를 면할 만한 삼간두옥의 오막살이 외딴집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서천군 동면 판교리 237번지요, 화제의 주인공인 김여사의 기구한 여생을 보내는 애처로운 생활의 근거지이다. 김여사는 고균 선생의 이름 중에서 자만을 떼어 김균이라 하는 당년 87세의 노인으로 고균 선생이 혁명에 실패하고 내지로 망명한 후 정적의 독수로 일족의 참화를 목격한 김여사는 자결을 도모한 일도 있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허위 장사로 세상의 이목을 속이고 금일 충청도, 명일 경상도로 조선팔도를 전전 유랑한 나머지 일곱 번 만에 현 재주지에 안착하야 오늘에 이른 것이라는데 슬하에 오직 외아들인 송돈헌씨가 있을 뿐으로서 아들 내외 세 식구가 산근야채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야 괴로운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는데 마침 우연한 기회에 서천경찰서 판교주재소 순사의 발견으로 비로소 동양의 위인이요 병합의 원훈인 고균 선생의 세상에 끼친 오직 하나인 매씨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라 한다.

김 여사는 서천경찰서장 이하 간부의 끊임없는 방문과 지성의 위문에 다시없는 감격을 느끼면서 광명을 보지 못하는 노안에 이슬을 머금고 오라버니의 애음하던 한시를 낭랑히 읊으면서 당시의 술회를 말하는 김여사의 태도는 노쇠한 와중에도 아직껏 귀골의 기풍과 침범치 못할 엄연한 기상이 남아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의 마음과 감개무량한 느낌을 지어내게 지어내게 하였다 한다.<후략>

▲판교에 살던 당시의 김균 여사. 증손녀 송순호 제공(청주 거주)
▲판교에 살던 당시의 김균 여사. 증손녀 송순호 제공(청주 거주)

김균 여사 1929년경 판교 정착

향토사학자 박수환 전 한산면장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김균 여사와 결혼한 송병의(宋秉義)는 거짓 장례를 치르고 새색시로 둔갑시켜 새 장가를 들어 충남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 93번지로 이주했다. 보령으로 이주하게 된 계기는 김옥균의 양아들 김영진 보령군수의 배려였다고 한다.

김균 여사의 남편 송병의가 19292월에 사망하자 아들 송돈헌은 서천군 판교면 판교리 237번지로 이주했다. 송돈헌의 아들 송재천은 판교면 흥림리에 사는 조용구의 딸 조민생과 결혼했는데 송돈헌과 조용구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으며 1919년 종천면장에 부임했다.. 따라서 조용구는 흥림리 옆 가까운 판교리로 이주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김옥균의 생질인 송돈헌의 손자는 송태호 전 문화체육부장관이자 현 동아시아미래재단 이사장이다. 한편 송돈헌의 친구 조용구는 고종17(1880) 문과에 급제하여 고종30년에 예조참판을 지낸 조동협의 아들로 가까운 친인척들은 종천면 석촌리와 문산면 문장리에 많이 살고 있다.

한편 김균 여사의 묘는 판교면 저산리에 있었으나 30여년 전 청주에 있는 종산으로 이장했다가 2007년 세종시에 있는 대전공원묘원으로 다시 이장했다.

▲판교에 살던 당시의 가족사진. 아들 송돈헌과 손자
▲판교에 살던 당시의 가족사진. 아들 송돈헌과 며느리, 앞줄 왼쪽은 김옥균의 아들

<허정균 기자>

1941122일 김균이 세상을 떠나자 매일신보는 1941213일자와 14일자에 김옥균의 아들이 김균의 49재에 판교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이 기사는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사료위원인 박수환 전 한산면장의 자료 제공과 자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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