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에 일어나는 아줌마
새벽 1시에 일어나는 아줌마
  • 공금란
  • 승인 2004.01.16 00:00
  • 호수 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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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순리에 발맞추며 농업을 통해 禮-예를 배운다
1996년, IMF체제 직전에 외가이자 고향인 한산으로 귀향을 결정한 양연순(44) 씨와 그녀의 가족 여섯 식구.
지난 토요일 오전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남편 이웅구(50세) 씨는 형광등이며 문틀까지 집안 구석구석을 닦고 있었다.
주말이면 낯설지 않은 그녀 집 풍경이다.
누가 가르쳐줘서 시작한 것도 아니지만 고향이 그리워 찾아오는 도회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산한 먹을거리와 조촐한 잠자리를 제공한 것이 요즘 이야기하는 ‘홈스테이’, ‘팜스테이’가 된 것이다.
기자가 찾은 날도 남편 웅구 씨의 초등학교 동창들이 그녀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로 되어있었다. 그들에게 접대할 음식은 오리농업을 하면서 키운 오리구이와 쌀, 표고버섯 구이, 거기에 서천의 바다에서 나는 것들로 봄에는 주꾸미, 가을엔 전어, 요즘은 석굴구이로 제철 해산물로 풍성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게 그녀가 직접 담근 한산소곡주로 분위기를 돋구는 일이다.
모처럼 고향, 시골마을을 찾은 이들이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다 배가 출출해 질 자정 무렵엔 표고를 키워낸 참나무 숯에 역시 직접 재배한 고구마를 노릇노릇 굽게 된다. 이렇게 인연이 된 사람들은 연순 씨가 생산한 농산물을 구입하는 고객이 되는 것이다.
한산면 단상리 일명 ‘땅고개’라 불리는 한산∼부여 가는 길, 서천군의 마지막 고개길가에 자리잡은 연순 씨네 보금자리가 있다. 오가다 보면 그저 그런 농가 한 채있어 별날 것도 별스럴 것도 없는 외딴 집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언제나 해맑은 2녀 2남, 양연순 씨의 초롱초롱한 2세들이 합창하듯 “안녕하세요”하는 인사는 너무 맑아서 오히려 객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하루일과를 묻는 말에 “무슨 사람이 새벽 1시면 일어나서 뒤스럭거리는 통에 죽겠네요” 옆에 있던 남편 웅구 씨가 푸념하듯 하는 대답엔 뿌듯함이 묻어난다. 저녁 7시든, 9시든 해떨어질 때까지 일하다 저녁 한술 놓기가 무섭게 곤한 잠에 빠지고 어김없이 새벽 한 두시에 일어나 도인처럼 명상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연순 씨.
언뜻 정신나간 아줌마처럼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도회에서 생활할 때도 쉽지만 않은 금형(金型) 일을 했을 정도로 강한 생활력의 소유자, 귀향 후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또 생업을 일구기 위해 몸으로 맘으로 분주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인 듯싶다.
“귀향 후 8년 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농사를 하기 위해 농업기술센타, 농협… 관련 단체를 수도 없이 들락거리면서 설득하고 도움을 청했지만 빈천한 여인네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었다”고 푸념하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농사란 바로 ‘친환경 농업’을 말한다.
양연순 씨는 “밥이 하늘이란 말이 있듯,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일, 그 자체를 ‘예(禮)’로 알고 농사일을 한다”면서 그 속에서 세상에 찌들었던 자신을 조금씩 깎아내고 본래 인간의 순박함을 찾는 게 인생인 것 같다는 삶에서 채득한 이치를 덧붙인다.
“농가공이 별것 아니다. 콩으로 메주를 쑤고, 엿기름을 기르고, 고구마순 따서 말리고 하는 것으로, 이런 것들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데 컴맹이라 인터넷이니 뭐니는 못해도 아름아름 알아서 엮여진 인연들로 직거래를 한다”는 연순 씨는 생산에서 가공, 판매까지 도맡는 억척이로 어려운 농기계 다루는 일도 남편에게 미룰 것 없이 척척해댄다.
2003년 연순 씨네 가계부채는 1억 4천여 만원, 다행히 올해 2천여 만원을 상환했다. 대개의 농가부채는 줄어들지 않고 계속 늘어난다는 통계로 볼 때 그녀의 가족들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마당에 세워둔 10년이 훨씬 넘은 승합차를 보면 안다. 그것도 그녀의 지인이 버리려던 차를 얻어다 준 것이다.
“농기계를 교체하고 고치고 하는 비용으로 한해 평균 1천만원, 농지 임대료 얼마, 아이들 교육비 얼마…” 올해 1억여 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겨우 2천만 원의 부채를 상환했을 뿐이라고 연순 씨는 말끝에 한숨을 매단다.
가격하락으로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고구마들이 창고에 가득해서 일까 기백만원의 용역비를 주고 설계한 주말농장 신청서가 아직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해서 일까.
그녀의 시름은 소주한잔이면 녹아 내린다. 연순 씨는 다른 이들의 안주는 철저히 챙겨주면서 막상 자신은 ‘깡술’을 마신다. 소주잔이 아닌 맥주잔에 소주를 따라 벌컥벌컥 들이키는 그녀, 가물어 땅에 착 달라붙은 잡초같이 모질게 살아가는 농투성이 생활의 시름이 독한 소주 한잔에 달래지련마는 오늘도 연순 씨는 그렇게 버티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꿈꾼다. 이름이 뭐냐고 묻는 말에 “뜰 범(汎)에 동산 원(園), 이범원이예요”라고 답하는 큰 영애, 그 이름을 그냥 붙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담았는 듯, 고향 내음이 그리운 이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농장을 일구는 꿈을 요즘들어 부쩍 꾸고 있다.
한가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인근의 농가들과 함께 친환경농산물을 생산해 들쑥날쑥한 농산물 가격과는 상관없이 고객들에게는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자신을 비롯한 농가들에게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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