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가정 교사
■ 모시장터 / 가정 교사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1.05.13 10:44
  • 호수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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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명문학교라 초고 학부모로부터 가정교사 부탁이 들어왔다. 거기에서 숙식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입주라고 불렀다. 대전으로 유학 온 가난한 학생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아르바이트는 없었다. 중 학생을 가르치고 고등학교 학생은 같이 공부해주면 되었다. 더러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있었다.

언덕 위에 있는 아담한 주택이었다. 착하게 생긴 중학교 2학년 곱상한 남학생이었다.

마당 한 가운데에 장미 동산이 있었다. 대문 앞을 들어서면 확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분홍, 빨강, 흰색, 주황색 등 갖가지 장미꽃들이 있었다. 주인은 틈틈이 진딧물도 잡아주고 가지도 정성스럽게 전정해주었다. 그야말로 장미 사랑 마니아였다.

하루에 1시간 정도 가르쳤다. 인수분해, 소인수 분해, 방정식 등 주로 수학이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매를 들었다. 뒤곁으로 가 몇 번 쥐어박았다. 당시엔 선생님이나 선배님들로부터 잘 못하면 빳다를 맞는 것이 예사였다. 아무리 아프고 속상해도 별 탈이 없었다.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고 우리는 또 그렇게 알며 자랐다.

시험 성적을 올리려는 내 욕심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야 오랫동안 그 집에 붙어있을 수 있었다. 부모가 그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내 깐으로는 공부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손을 대었던 것인데 일이 그만 그렇게 되고 말았다. 어린 나로서는 매를 대는 것이 공부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엔 학교에서나 서당에서나 회초리 교육은 필수였다. 물론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교육 방식이었다.

, 이 돌머리야.”

그렇게 머리를 쥐어박으면 학생들은 피식 웃었다. 그 때는 그런 것들이 자연스러웠고 일상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거기에는 익살 같은 따뜻한 애정이 묻어있었다.

어린 고1 학생이었으니 내 무슨 철이나 있었겠는가. 나는 얼마 후에 그 집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3번이나 가정교사로 떠돌았다. 그런데 오래 붙어있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날은 하도 졸려 낮잠을 잤다. 공교롭게도 주인한테 들켰다. 아이는 공부하는데 가르치는 작자라는 사람은 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또 쫓겨났다. 맑은 정신으로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 오해를 샀다. 또 한 번은 중학생을 가르쳤다. 여름철이었다. 문을 열고 잠시 나가 있었는데 누가 책을 훔쳐갔다. 그 때는 책 도둑이 더러 있었다. 애지중지 아꼈던 일본판 영어 콘사이스와 참고서 일부가 없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또 집을 나오게 되었다. 가정교사 생활을 셈해보면 반년 좀 넘어 했던 것 같다. 서너 달도 견디지 못하고 쫓겨난(?) 셈이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극심한 사춘기를 겪었다. 그 때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2 때인가 나는 소설 읽기에 미쳐있었다. 당시 나의 독서 수준은 바닥 이하였다. 책이 없어 동화는 중학교 때, , 소설은 고등학교에 와서야 겨우 접할 수 있었다. 미천했던 그런 내가 국문학자라니 운명은 말도 안 되는,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다.

자취도 두어 번 했었고, 모르는 농아 친구와도 하숙을 했었다. 정신적 혼돈으로 이래저래 공부는 저쪽이었다. 셈도 둔했고 관계도 원만치 못했으며 소통도 부족했다. 그런 요란스러운 사춘기를 거치는 동안 고등학교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졸업한 것만도 내겐 천운이었다.

반백년이 지났다. 격세지감이나 깊숙이 묻어두었던 나의 치부를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아파트 경비실 초겨울의 낯선 바람

반백년 지나 이제금 안부를 묻고 가나

초겨울 저녁 햇살이 서럽도록 고즈넉하다

- 석야 신웅순의 묵서재 일기 6

 

잠시이긴 했어도 지금은 60대 중후반 되었을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슴 속 무거웠던 댓돌을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숙명이 우리들에게 있다면 삶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많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후회의 나부랭이 글로라도 이런 마음들을 잠시 돌려놓을 수 있으니 그만으로도 바랄 게 없다.

봄비가 내리는 아침이다. 올해도 부모님 산소에 가지 못했다. 오늘은 이런 아들 모르고 가신 부모님께 뜨거운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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