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서천군 관아(치소-관청)가 걸어온 역사(2)청사 건물의 변동
■ 특집 / 서천군 관아(치소-관청)가 걸어온 역사(2)청사 건물의 변동
  • 박수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 승인 2021.06.03 18:23
  • 호수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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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관아 소실, 동학혁명으로 일부 소실

조선 관아 자리에 1921년 청사 신축, 1931년 증축

현재 건설 중인 신청사가 완공되면 서천군 청사는 다시 한번 위치가 바뀔 것이다. 향토사학자이자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인 박수환 전 한산면장이 백제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천군의 명칭과 관아의 위치 등을 여러 문헌을 바탕으로 총정리해 뉴스서천에 보내왔다. 지난호에 이어 청사 건물의 변동에 대해 싣는다.<편집자>


일제강점기 청사 신축

▲일제강점기 서천군 청사
▲일제강점기 서천군 청사

<일본식 청사 신축>

1910년 한일강제 합병 이후 조선시대 남아있던 관청 6(1,584)을 철거한 후 대정10(1921) 조선총독군수 권익채(權益采) 군수가 군비로 현 위치 군사리356-3번지에 목조기와로 715평을 신축하였고, 소화6(1931)에는 군청회의실(89)을 증축하였다.

<해방 후 청사 개축>

▲현 서천군 청사 낙성식(1966년)
▲현 서천군 청사 낙성식(1966년)

일본식으로 신축한 군청사를 사용하다가 홍순국(洪淳國) 군수(재임:1964326-1966531)가 콘크리트로 스라브 2층으로 개축하였고,1966830일 준공, 그 후에 별관, 후별관을 신,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 서천군 청사
▲현 서천군 청사

관아의 역사적 주요 사건

<임진, 정유재란의 왜군침입 관아 소실>

1597년 정유재란을 거치는 동안 정유재란 시 서천군청의 관아와 향교는 왜군의 침입으로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의 소실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군청 관아와 서천향교는 복구 되었다.

<동학혁명으로 관아 일부 소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전북고부의 동학주력 농민군이 금강을 건너 한산면 신성리 신성포를 거쳐 지역 내 동학무리들을 규합하여 1112일 한산군 읍성을 점령하고 관아에 불을 질러 관아가 많이 소실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1120일에 서천군 읍성을 점령하고 관아에 불을 질러 또 다시 관아시설이 소실되었다. 조정의 진압군과 일본군의 지원으로 동학군이 진압되었다. 다시 관청이 복구되었다.

<홍주의병의 군관아 점령 군수 강금>

1906513일 민종식 등 2차 홍주 의병이 서천군청에 난입하여 서천군수 이종석(李鍾奭)을 강금하고 인장을 빼앗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공주감영은 진위대를 파견하여 의병을 진압하였다.

고향출신 서천군수 유황(兪榥) 1599(선조32)~1655(효종6)

비인면 남당리는 청절사(淸節祠)가 자리하고 있다. 청절사는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로 입향한 기계유씨 유기창(俞起昌)을 주벽으로 모신 사당이다. 유기창의 후손들은 많은 인재를 배출한 인물들이다 그의 아들 유여림(俞汝霖)은 한산군수와 예조판서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유강(兪絳)은 도승지,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유강의 고손 유황(兪榥)이 서천군수(1651-1652)를 역임했다. 서천군수 재임기간 업적은 대단하였다.

 

▲서천군수 역임(1651~1652) 유황 영정
▲서천군수 역임(1651~1652) 유황 영정

<선정내용>

유황의 둘째 아들 유명뢰(兪命賚)의 가장(家狀)의 기록을 보면, 형조참의에 배수되었는데 165111월 고향의 부모님을 편히 봉양하기 위해 서천군수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서천군수로 부임을 하였는데 군내에는 과일을 거두는 부세가 있어 백성들의 오랜 고통이 되었는데 서천군수 유황(兪榥)은 과일부세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성내(城內)의 비어있는 땅에 과일나무를 많이 심어 그로 하여금 훗날 영원히 부세를 면할 수 있도록 도모하였다. 군수로 (1651.10-1652.7) 있는 동안 재물을 쌓아 창고를 가득 채워서 1년간의 백성들의 과일세금을 대신 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에 서천군 천방산(千房山)내 천방사(千房寺)가 있었는데 천방사는 대사찰로 공주원당(公主願堂-공주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었다. 그러나 중들이 사납고 포악하여 관()의 명령(命令)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군수 유황(兪榥)은 그들을 불러들여 타이르고 번잡하게 감독하지 않았는데 모두 크게 변하여 아름다운 풍속으로 옮겨갔다. 현종5(1664) 그 후임으로 온 군수(겸직군수 한산군수 신숭구)가 이곳 천방사와 화목하지 못하여 파추(罷推-파면)되었는데, 사찰의 승려가 사찰을 불태우고 죽이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의심하던 자들이 비로소 복종하였다.

또한 서천군내 냇물을 막아 놓고 결세(結稅)를 떼어 받는 궁장(宮庄-궁에 딸린 논밭)이 있었는데, 군의 아전 류계남(柳季男)이 한통속이 되어 간악한 짓을 하여 백성들의 밭이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다. 군수 유황(兪榥)은 빼앗긴 토지를 모두 돌려주고 냇물을 막은 것을 무너뜨려 백성으로 하여금 예전처럼 농사짓게 하였다. 류계남(柳季男)을 감옥에 가두고 무거운 형벌로 다스리려 할 때에 왕께서 일이 관방(官房-공무)에 관계된 것이라고 여겨 아전의 행위에 연좌되어 파추(罷推-파면)할 것을 명령하였다. 온 읍내(邑內-군내)의 남녀노소가 길을 막고 군수 유황(兪榥)이 더 머물 수 있기를 원하였으나 이미 왕명이 있어 머물 수 없었다.

떠난 군수 유황(兪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1652년에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를 세웠다. 유황(兪榥)은 그길로 비인(庇仁)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다른 사람의 정사(亭舍-거처하는 집)를 빌려 그곳에서 거처하면서 벗들과 함께 시를 읊는 것으로 즐겼다 그 후 1653년에 병조참의에 배수되었고, 효종6(1655)418일 향년57세로 돌아가셨다.

서천군청 민원실 앞 군수 兪榥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서천군청 민원실 앞 군수 兪榥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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