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질 듯 이어지는 모시 줄을 잡고 있는 사람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모시 줄을 잡고 있는 사람들
  • 공금란
  • 승인 2004.02.13 00:00
  • 호수 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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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방문 앞에서 도란도란 주인을 기다리는 고무신
2월이 윤달인 탓일까, 정월보름이 지나면 서서히 한해 농사을 시작하는 시기지만 들판은 아직 잔설과 찬바람이 주인이다.
요즘 기자의 발길이 부쩍 잦아진 곳이 몇 군데 있다. 그 중의 한 곳이 화양면의 아름다운 금강가 마을 완포리이다. 금강하구의 넓은 뜰을 품고 있어 보기만 해도 풍성하고 마을 뒤로는 너무 낮아 산이라고 하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나즈막한 산, 그 속에서 겨울을 정겹게 나는 사람들의 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완포리에 가면 서천의 명물 세모시를 만날 수 있다. 한산세모시 중에도 최상의 것이 생산되는 곳이 화촌, 문촌, 완포 등의 화양 뜰에서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먼저 맞이하는 마을회관 앞, 얼마 전에 새워진 마을 노래비도 햇살을 반사하며 뽐내고 서있다. 마을화관의 열려진 문틈사이로 빼곡이 들어찬 신발들이 보인다. 언뜻 보기에도 모두 남정네들 것뿐 여인네들 것은 한 켤레도 뵈질 않는다.
남자 노인들만 있던 방에 새내기바람을 몰고 들어오는 아낙을 어찌 아니 반기겠는가. 하지만 남정네들 목소리만 흘러나오는 방문을 새파랗게 젊은 아낙이 선뜻 열어제치는 데에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곳이다.
어쨌거나 일단 문을 열면 반기는 목소리를 듣게 되고 흩어진 과자봉지 등을 주섬주섬 모아 쥐는 거칠고 둔한 어르신들의 손을 보게된다.
노인정을 겸하고 있는 방마다 뜻밖에 갖가지 물리치료기들이 있어 놀라자 “어디가도 우리 동네만큼은 없을 거네, 얼마나 좋은 줄 알어?” 안마해 줄 자녀들도 없고 부부가 산다 손치더라도 서로 늙었으니 등 긁어줄 힘이나 남았으면 족할터, 무슨 힘으로 서로의 어깨며 허리를 주물러줄까. 사정이 이렇다보니 당연 노인들이 지키고 있는 농촌마을의 물리치료기들은 고마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을까하는 궁금증도 쉽게 풀렸다.
“일 철 닥치기 전에 춘삼월 봄나들이나 가자는 얘기였지, 설악산이나 가자네” 한 어르신의 말이다. 왜 어머님들 빼놓고 회의 하냐는 물음에 “안사람들은 내외를 하는 지 안 간다네, 모시도 하고 말이지, 그리고 여자들이 가면 힘들어” 일발 웃음이 터지며 거드는 말 “우리도 말이 그렇지 설악산 올라나 가겠어. 입구쯤 가서 여기가 설악산이구나 하고 돌아오는 게지” 맞장구치며 아이들처럼 좋아한다.
마을 노인회장 허 노인((76)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아낙들이 모여 모시 일을 한다는 정순자(65) 씨 댁의 마실방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정네들이 회관 방에 모여 봄나들이 의견에 분분한데 여인네들은 모시 길쌈에 분주한가 보다. 하얀 고무신, 검정고무신 들, 방안에 있는 주인네들처럼 도란도란 어깨를 맞대고 있어 방문 밖도 정겹기만 하다.
두세 평되는 그리 크지 않은 방을 베틀하나가 차지하고 있고 연신 꾸리를 감아대는 주인네 정순자 씨, 허벅지 내놓고 무릎이 닳도록 삼고있는 임정숙(72)씨, 이에 뒤질새라 오순예(77), 유순태(62), 최순여(78), 한용옥(65)씨 등은 이가 시리도록 모시 째기에 바쁘다. 이 한군들이 모여있으니 방은 발 딛을 틈이 없다.
베틀에 앉아 손발을 재게 움직이는 이는 주인네 일손을 돕는 중이란다. 마치 베틀 소리에 맞추는 동작 하나하나가 슬픈 춤사위를 보는 듯하여 방안의 풍경은 엄숙하기까지 하다.
아직 완포리에서는 모시를 생산하는 전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고령의 아낙들이 모시를 손에서 놓더라도 젊은 아낙들은 더 이상 모시에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한 장 도막에 한 굿이나 하면 다행이지, 이일 저일 하다가 틈틈이 하니까” “그래도 찾는 사람이나 많고 값이나 나가면 열일 제쳐놓고 하겠네” “이 닳는 만큼도 벌이가 안돼, 그냥 노느니 하는 게지” 쉽게 쉽게 흘리는 한마디 한마디는 사양길로 접어든 모시의 운명을 알기에 서글프기만 하다.
마실방에 모여 모시를 하는 사람들은 자녀가 다 객지에 나가있어 함께 사는 이들은 없다. 이렇게 남정네들은 마을회관에서, 아낙네들은 마실방에서 정담을 나누며 외롭고 긴 추운 겨울을 나고 있는 완포리 노인들이다.
마을의 이곳저곳에 기자를 안내하던 허 노인은 “일년에 한번씩만 우리마을이 좋은 일로 신문에 났으면 좋겠다”한다. 신문에 나는 일이 무엇이 그렇게 좋을까마는 “신문에 이름이 딱 박혀봐, 당연히 반듯하게 살라고 하지”라는 말로 부와 명예를 떠나서 자기 이름 더럽히지 않고 한평생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깨우게 한다.
그나마 농한기나 하니 한가롭게 회관나와 정담이나 나누고 마실방에서 모시 삼는 일을 볼 수 있지 농사철 접어들면 모두가 논에서 산다.
아니 벌써부터 몇 안 되는 젊은이들이 농기계를 매만지고 있는 것을 보니 회관에 빼곡하던 신발이며, 마실방의 검정, 하양 고무신들은 논두렁에서 도란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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