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8)익산시 ‘웅포(熊浦)’
■ 기획취재/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8)익산시 ‘웅포(熊浦)’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8.25 22:26
  • 호수 10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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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충청 어선 드나들던 물류 집산항 웅포
철도 개통되며 군산으로 이전 1972년 폐항
금강하둣둑 막히며 풍요롭던 어장도 사라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유람선 선착장이 들어선 곰개포구가 있던 자리
▲유람선 선착장이 들어선 곰개포구가 있던 자리

금강을 두고 한산면과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 익산시 웅포면과 군산시 나포면이다. 곰개나루로 불리던 웅포는 신성리갈대밭 바로 건너편이다. 강을 끼고 산뭉치가 우뚝 솟아있는데 곰의 형상을 닮아 웅포라 했다 한다.

산을 의지해 하류 쪽으로 웅포항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웅포는 금강에서 가장 큰 항구였다. 1428(세종 10)에 조선 초기에 덕성창(德成倉)을 설치해 1487(성종 18)까지 전라도 전주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稅穀)을 모아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조선 후기에는 해창(海倉)으로 전국 5대 시장에 포함되었으며 강경포와 군산포의 기항지였다.

익산문화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웅포는 군산항 개발 전까지 전라 충청도는 물론 멀리 제주도 어선도 드나들던 집산항으로 연중파시를 이루었다 한다. 400~500석의 쌀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

한 사리(15일 간격)에 출입하던 어선 수만도 300~400척에 3km까지 이상 줄을 지었다. 객주만 수십 명에 이르렀으며 보부상이 수백 명씩 모여들어 소금을 비롯 해산물을 받아갔다.

▲웅포 위치
▲웅포 위치

일제 때 군산부(郡山府)가 발행한 군산개항전사에는 군산~강경간의 90(36km)는 수심이 3~4질, 강폭은 넓게는 400, 좁게는 300간이라 기록하고 있다.

수운을 이용한 이러한 교역 상품은 철도가 개통되면서 군산으로 흡수당했다. 1912년에 군산선이 개통된 데 이어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라는 사설 회사가 천안에서 장항에 이르는 144.2km의 철도를 놓기 시작하여 192261일 충남선이라는 이름으로 천안에서 온양까지 개통하였으며, 이후 193181일에 전구간이 개통됐다. 물류의 중심은 군산과 장항으로 옮겨갔다. 이후 발동기선으로 맥을 이어오다 1972년에 완전 폐항이 됐다.

폐항이 됐지만 웅포는 금강 하류의 풍성한 어족자원의 중심으로 어항으로의 기능을 유지했다. 민물 재첩, 봄에는 황복, 우어, 겨울에는 빠가(빠가사리), 여름에는 장어 봄에는 실뱀장어를 잡아 많은 소득을 올렸다. 그러나 1991년 금강하굿둑이 생겨나면서 웅포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용왕제를 지내던 용왕사 터
▲용왕제를 지내던 용왕사 터


주민 인터뷰

하굿둑 막히면서 완전히 배려버렸어요

금강변에 위치한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에서 살면서 어업을 하셨던 서춘기(1961년생) 님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 금강하굿둑을 막기 전에도 어업을 했습니까?

= 어업을 했었죠. 하굿둑을 막고 나서 물이 싹 잠기니까, 그때부터 끝났죠.

- 원래 잡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 민물 재첩, 봄에는 황복, 우어, 겨울에는 빠가(빠가사리), 여름에는 장어, 장어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잡았어요. 실뱀장어는 봄에 잡고 그랬어요.

- 우어는 얼마나 잡혔습니까?

= 숭어를 잡을려고 살맥이를 하잖아요. 그러면 우어가 바닥에 하얀했어요. 너무 많아서 못 건졌어요. 지금은 (여기에) 한 마리도 없어요. 하굿둑 밑에나 가야 봄이 되면 나오지. (예전에) 우어가 강경 위에까지 올라가고 그랬어요. (우어가) 민물먹고 올라가요. 예전에 우어를 먹어보면 굉장히 꼬수와요. 지금은 음식에서 파는 것이 대부분 바다에 나오는 거라 (뼈가) 억셔요(억세요). 그리고 고수한 맛이 안나요. 김포시 대명항을 한번 가봤더니 우어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임진강에서는 황복도 나오고. 바다와 민물이 연결된 데는 다 올라갔어요. 큰고기만 줍고 나머지는 발로 차버리고 그랬어요. 내버렸죠. 우어는 납작해서 봄에 횟감으로만 먹고, 지지면(찌개로 만들어 먹으면) 국물과 실가리가 맛이 있거든요.

- 황복도 많이 잡혔습니까?

= 황복도 많이 나왔지. 1980년대 후반 때만 해도 황복 한 마리당 3만원 씩을 받았응게요. 식당에서 3만원 씩을 주고 사갔어요. 저희는 이것(하굿둑)을 막고 나서 완전히 배려 버린 거예요. 장어 많이 나왔지. 여름에는 숭어가 많이 나왔지. 겨울철에 빠가사리를 최고로 많이 잡을 때 600킬로(kg)까지 잡아봤응게요. 삼마이그물 가지고 혼자서.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곳에 사는데 밀빠가라고도 했어요. 그때 당시에 4킬로에 8000원씩 해서 120만원 정도를 벌었죠.

- 재첩을 잡았으면 옹포 앞의 금강에 모래가 많았습니까?

= 모래바탕이었어요. 깊은 물골만 빼고는 거의 다 모래사장이었어요. 금모래요. 모래가 참 좋았어요. 봄에 재첩이 까면 여름되면 요만씩(손톱 정도 크기) 커요. 그정도로 여기가 좋았어요. 성장속도가 굉장히 빨아요.

- 어업 구역은 어디였습니까?

= 군산 앞에서부터 저기 위에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다 잡았어요. 이거(하굿둑이) 막히면서 완전히 배려버린 거예요. 여기 안 막았으면 여기가 황금어장이예요.

- 웅포에는 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 나 어렸을 때는 군산이 (어선) 배가 없었어요. 배들이 다 이쪽으로(웅포로) 들어왔지. 저 어렸을 때는 여기서(웅포)부터 강경까지 배가 줄을 섰어요. 큰 고기배들이. 그때 당시는 배가 커봤자, 5, 6톤 정도밖에 안 됐죠. 많이 들어왔을 때는 한 백여 척 이상이 들어왔다고 봐야죠. 수산물을 실고 와서 여기서 하역을 하면, 여기에 객주집들이 여러 집이 있었어요. 그 집들이 사가지고 장사꾼한테 팔고 그랬지요. 젓갈도 담고. 서울서 사러도 오고, 군산, 익산 등지로 다 나갔어요. (그때 당시는) 군산에 항구가 없었은게요. 인천항, 여기(웅포), 목포가 제가 어렸을 때 가장 컷다고 봐야죠. 여기(옹포)로 못들어 오면 군산으로 들어가고 그랬죠. 군산에는 어선배가 별로 없었죠. 강경은 여기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됐죠. 곰개포구(‘웅포의 옛 지명)라고 하면 서울 사람들도 많이 알았어요. 웅포라는 데는 모르고 곰개포구라고 하면 연세 많으신 분들은 많이 알아요. 조금때 들어오면 15일 지나야 사리가 되거든요. 그때부터 (잡은 물고기를) 다 못퍼가지고 (바다로) 못나가는 배들도 있었어요. 들어와서 여기서 다 처리를 못하니까 한 사리씩 걸러서 나가는 배들도 있었어요. (배가) 워낙에 많아서 짧은 시간에 다 못푸니까요.

- 당시에 웅포의 규모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 여기가 웅포면 웅포리 1, 2구 거든요. 2구만 해가지고 90호가 넘었어요. 제가 저기 산밑에서 살았거든요. 여기서부터 거기까지 가는 데가 전부 집이라 처마밑으로 가면 비를 안 맞고 가고 그랬어요. 그정도로 많았어요. 그집들이 지금은 아무 것도 없어요. 지금도 논을 파보면 옛날에 불 때던 자리, 깨진 사금파리가 겁나게 많이 나오고 그래요. 웅포는 여기(하굿둑)를 막고 나서 배려버렸어요. 이거 안 막았으면 여기 먹고사는 데 하나도 지장이 없었어요. 농사를 안 져(지어)도요. 그때만 해도 돈도 잘돌고. 걱정이 없었어요. 아줌마들이 여기 와서 (그물에서) 따야(떼어내야) 하니까, 아줌마들도 놀지 않고 일허고. 재첩 잡을 때는 골라야 하니까 일허고. 여기 막히고 나니까 돈이 똑 떨어져 버린 거죠. 하굿둑 수문 닫기 전까지 그랬어요.

- 배가 강경에도 많이 갔습니까?

= 강경까지 많이 들어가고 그랬어요. 대부분이 강경쪽을 젓갈배들이 많이 들어갔어요. 서해안쪽에 있는 배들이 이쪽으로 다 온다고 봐야죠. 목포로 들어가는 배들도 있었고, 여기로 많이 들어가고 그랬죠. 옛날에 여기가 대단한 데였어요(곳이었어요). 여기 곰개, 웅포라는 데가 유명했어요. 강경은 새우젓 때문에 유명하지, 옛날에는 (마을 규모가) 여기에 비하면 게임도 안 되지. (배가) 여기(웅포)에 댈 데가 없으면 거기(강경)로 간 거지. 거의 여기서 한 사리씩 묵으면서(숙박을 하면서) 풀라고(퍼내리려고) 하지, 거기(강경)까지 가려고 하지 않았어요. 강경쪽으로 갈수록 수심이 낮아지니까. (배가) 사리 때나 올라가지, 조금 때는 못올라가니까. 여기서 사리 때까지 못푸면 거기로 올라가고 그랬지.

▲웅포에서 고기잡이 한던 어부 서춘기(오른쪽)와 대화하는 취재팀

- 당시에 철새들은 얼마나 많이 서식했습니까?

= 여기가 썰물이 되어서 물이 쪽 빠지면 시끄러워서 잠을 못잘 정도였어요. (겨울철에) 고니, 기러기, 오리 이런 것들이 와가지고 모래사장에 깜해요, 깜해(아주 많았어요). 엣날에는 먹을 게 없으니까 농약에다 나락을 버물러서 거기다 뿌려놓으면 어업을 하러 새벽에 나가보면 겨울에 빠가(빠가서리) 잡으러, 저밑으로 내려가면 들물 때 보트들이 지켜고 있어요. 그것을 건지니라고. 가마니로 몇 가마씩 줍고 그랬어요. 그래도 표가 안났어요. 그렇게 (새들이) 많았어요. 하얀 큰고니가 천여 마리가 왔을 거예요. 지금은 거의 안 와요. 고니를 작대기로 때려서 잡기도 했어요.

- 가창오리는 얼마나 있었습니까?

= 저 아래쪽으로 가면 가을이 되면 가창오리가 와서 군무를 하고 그래요. 그때도 가창오리가 많았어요. 물이 쓰면(빠지면) 민물되어 버리니까요. 옛날에는 겨울이 되면 엽총사들이 와가지고 많이 잡아갔죠. 불법이죠. 경찰에 신고해봐야 못잡아요.

- 웅포에 와서 소리를 한 소리꾼이 있었습니까?

= 추석봉 씨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그분 아들이 입접리 입구에 있는 집에서 살아요. 추석봉 씨가 소리를 잘했어요. 여기 근방에서는 명창이라고 봐야죠. 멀리까지 잔치집에서 불러서 가고 그랬어요. 군산 나포, 익산 함라, 용안 이쪽으로는 거의 그분이 잔치 다니면서 노래를 불르고 그랬어요. 아주 잘해요. 동네분들이 먹고 놀고 하면 여기 웅포에 와서 노래도 불르기도 하고 그랬죠. 여러 분들이 노래를 불르러 오고 그랬는디 추석봉 씨가 거의 불렀다고 봐야죠.

- 예전에 배를 타고 어떻게 다니셨습니까?

= 나룻배를 타고 아래쪽으로는 저기 서천 용산리 쪽으로 왔다갔다 하고 그랬어요. 군산 나포로도 다니고 그랬어요. 위쪽으로는 양화로 다녀오고 그랬어요. 강경에서는 부여 양화까지만 왔다 가고, 여기(웅포)서 양화로 올라갔다가 오고 그랬어요. 그리고 양화 앞에서도 건너 다니고 했어요. 옛날에는 배타고 강경상고까지 가고 그랬어요. 이 앞에 서천 신성리 사람들도 배타고 다니고 그랬어요. 신성리 사람들이 산길로 해서 양화로 가거나 여기로 와서 양화로 배타고 가고 그랬어요.

- 하굿둑을 막고나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 저는 농사가 없어요. 그래 가지고 철구조물 건축을 해요. 창고나 소막같은 거 지으러 다녀요. 장사도 해보고 별것 다 해보다가 안 맞아서 그만 두고, 이 일을 해보니 잘 맞아서 계속하고 있어요. (이전에는) 저 강원도 원주까지 가서 오리장사도 하고 별것 다 해봤어요.

- 당시에 어업을 하던 분들이 얼마나 남아 계십니까?

= 다 떠나고 한 3명 정도가 남아 있어요. 다 돌아가시고 없어요. 지금도 유일하게 내수면 어업을 하는 분이 한 명이 있어요.

<주용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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