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 전성시대, 이제 아련한 추억일뿐…
장항 전성시대, 이제 아련한 추억일뿐…
  • 공금란
  • 승인 2004.02.27 00:00
  • 호수 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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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님,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아직 2월인데 춘삼월 바람 맛이다.
훈기도는 햇살이 온몸을 파고들던 지난 20일 오후, 마서 남전 마을, 장항 옥남리를 두루 지나 장항 도선장에 닿았다.
오는 길에 FTA고 뭐고 추위가신 들녘에선 검불을 태우고 논갈이를 하는 부지런한 농부도 만나고, 대보름 뒤끝인 탓일까 시골마을 담벼락 밑에 벌어진 윷판에 신명을 쏟고 있는 이들도 만난다.
이어 장항 해안도로 따라 달리다보면 화려하게 걸려있었을 간판들이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빈 점포들. 또 도선장 옆 화물선의 하역작업 인부들도 물량이 전에 없이 줄어든 장항항의 현실을 대변하는 양 한가롭게 막걸리 내기에 윷을 던지고 있다.
장항의 전성시대는 이제 아련한 추억일 뿐 다시 오지 않는 것일까.
이런 저런 장항의 모습을 보면서 낙담하고 있는 기자의 마음을 빼앗은 풍경하나, 도선장 옆 바닷바람에 풀풀 날리는 흙먼지 아랑곳없이 게이트볼에 활력을 일구는 노익장 회원들.
게이트볼협회 장항지회는 김윤구(75) 회장을 비롯해 가장 젊은 회원으로 총무를 맡고있는 조남섭(58) 회원부터 88세 고령의 임승기 회원까지 40여명에 이른다.
15M×20M의 게이트볼 경기장 두 개가 나란히 있지만 그나마 하나는 울퉁불퉁한 바닥에 잡초까지 있어 한참 손을 봐야할 처지다.
구경 좀 하겠다며 다가가는 이방인 기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어디서 왔소?” 쑥스럽게 명함을 내밀기 무섭게 “여기 앉아 우리 얘기 좀 잘 듣고 군수님한테 말 좀 전해줘” 칠순의 신양덕(70) 회원은 요즘 문제가 된 장항중앙초등학교 내 게이트볼 장에 얽힌 사연을 토로하면서 노기마저 서린다.
40명 가까운 회원이 있지만, 바닷가 노지에 설치된 게이트볼장의 여건이 회원들 마저 발길을 끊게 한 요인이란다.
“우리 늙은이들이나 나오지 좀 젊다는 사람들은 얼굴 그을릴까봐 안나오고 춥다고 안나오고 “ 푸념하는 신양덕 회원의 말에 “군수님이 말이지,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우리들 운동하는데 지장이 없게 해줬으면 좋겠수다” 덧붙이는 조남섭 회원. 모든 회원들이 한꺼번에 쏟아 놓는 불만에 괜스레 면구스러워 진다.
말로는 경로효친 찾으면서 실상 서천의 노인복지 실태는 어디에 명함 내밀기도 부끄러운 실상이니 말이다. 사실 젊은 사람들 같으면 당장에 자기들이 십시일반, 기금이라도 조성하고 비가림 시설이라도 했을 터다. 하지만 노인들 주머니야 일찍이 자식들한테 다 도둑맞고 빈털터리 아니던가.
기자가 무슨 힘이 있어 이 어른들을 편하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게이트볼을 즐길 수 있게 만들랴마는 힘있는 사람이 속해 있는 모모 단체 시설비에 수억 원 씩 투입한 것을 익히 아는 까닭에 주책없이 부화도 끊어 오른다.
“초등학교에 있을 땐 좋았는데” “전에 있던 교장은 말이 통하드만, 요번 여교장은 말이 안통해” 하면서도 “애초 초등학교에 만드는 게 아니었지”하는 회원들의 요지는 결국 차라리 초등학교에 있는 시설을 뜯어다 도선장 옆에 있는 경기장을 눈비 안 맞고 운동할 수 있는 시설로 만들어 달라는 요지다.
언뜻 보기에도 지금이야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지는 봄철이라서 견디겠지만 5월만 들어서도 나무 한 그루 없는 땡볕에 아무리 게이트볼이 좋을지언정 누가 나와서 운동할까 싶다.
전반 30분 막간의 휴식시간 어디가나 살림꾼은 있는 법. 할머니 회원이 돼지머리 고기에 소주 대 병을 내놓는다.
서천 게이트볼 회원들의 활동은 대단해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고 이다. 지난 해 2003년, 당진에서 열린 충남여성대회에서 우승했고 전국규모 대회에서 수 차례 8강에 진출하는 등 저력 있는 단체이다.
“서천이 젤 낙후 됐어, 회원 숫자 늘리면 시설 좋게 해준다더니 자기들끼리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이 모양이네” 아마도 장항중앙초등학교에 있는 게이트볼장 보수공사가 군과 학교측의 이견 때문에 어그러진 것에 자꾸 화가 나는 모양이다.
아무리 좋은 사업이나 시설일지라도 당사자들의 의견이 제일로 중요한데 구경이나 하자고 찾아든 풋내기 기자의 입을 비러 자신들의 뜻을 전달하고 자하는 노인들이 마냥 안쓰럽기만 하다.
돼지머리고기에 어느 어른이 따라 주는 소주한잔-정확히 말하면 찻잔 가득 따라준-하고 후반 경기가 막 시작하는 것을 보고 돌아서는데 마침 유람선이 도착하고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역시나 게이트볼을 즐기는 남녀노인들이 이색적인지 한동안 시선을 놓지 못하고 지난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자신들의 노후 모습을 상상해 보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늙어서 뭔가 하려고 하고 할 일이 있다는 것, 꼭 경제적 가치가 있는 일을 논한다면 할말이 없다. 하지만 장애인 복지, 청소년 복지나 노인복지 등은 수치타산을 논할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한 때 나라의 산업역군으로, 특히 장항의 정성시대에 젊음을 바쳐 일해온 어른들, 그들의 수고에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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