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월남 이상재 선생과 3.1운동
■ 특집 / 월남 이상재 선생과 3.1운동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2.03.04 17:42
  • 호수 10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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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 선생, 우당 이회영 등과 고종 망명 기도

일제의 ‘고종 독살’로 실패…장례식, 3.1운동 기폭제

월남 이상재와 우당 이회영

▲ 망명을 계획하는 우당 6형제의 회의. 자료 우당기념관
▲ 망명을 계획하는 우당 6형제의 회의. 자료 우당기념관

1910829일 일제가 나라를 병탄하자 우당 이회영 6형제는 가산을 정리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출발에 앞서 김진호(金鎭浩 1873~1960), 강매(姜邁, 18781941) 등 두 동지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이 일을 우관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상재·전덕기 두 분은 사회·종교 방면의 믿을 수 있는 지도자이며 국사를 의뢰 상의할 수 있는 분들이니 앞으로 두 동지의 활동에서도 이분들에게 중요한 일을 상의하라고 당부하였다

이회영 선생의 동지였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이회영 선생 일가의 집단 망명에 이렇게 말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일가족 40여 명이 한 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우당 이회영은 길림성 유하현 황도촌(黃道村)에 정착해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212월에 첫 졸업생 11명을 배출한 이래 1920년 폐교시까지 졸업생 2000여 명을 배출해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은 이 학교 출신들이 주도했다.

우당 이회영의 재입국과 고종 망명 기도

1913년 늦은 봄 우당 이회영은 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그는 윤복영(협성학교 설립자)을 찾아가 수개월 동안 숨어 지냈다. 이어 월남 이상재 등 동지에게 환국 사실을 알리고 앞날을 상의했다.

1918년 가을이 됐다. 이 때는 1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때로 이 해 초에 발표된 미국 윌슨 대통령의 연두교서가 화제가 되어 민족자결주의와 독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이 무렵 이회영은 이상재, 유진태, 안확, 이득년 등과 아침 저녁으로 밀의를 거듭했다고 이정규의 <우당 이회영 약전>에 전한다.

당시 이들은 세계적 변동기를 이용해 황제께서 국외로 망명하시고 합방이 왜적의 강도적인 폭력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황제 자신이 직접 전 세계에 폭로하시면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는 영친왕 이은(李垠)과 왜 왕실의 방자 여사와의 혼담으로 황제의 고민이 많을 때였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터라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황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시종 이교영이 이들의 생각을 고종에게 전하자 고종은 이를 쾌히 승낙했다.

이어 이회영은 민영달을 찾아가 고종의 뜻을 전하자 민영달은 황제의 뜻이 그러하다면 신하된 나에게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나는 분골쇄신 하더라도 황제의 뒤를 따르겠다고 승낙했다. 다음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 실린 이후의 진행 상황이다.

이리하여 선생은 민영달과 비밀히 만나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하였다. 먼저 수륙(水陸)두 가지의 출국 행로를 비교하여 배를 타고 가기로 하였고, 다음 행선지에 대해서는 우선은 중국으로 하고 상하이와 빼이징을 비교해 빼이징에 행궁을 정하기로 하였다. 민영달은 자금으로 5만원()을 내놓고 선생은 준비작업을 맡기로 하였다. 1918년 말 무렵이었다. 선생은 민영달이 내놓은 자금을 선생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하고, 고종황제께서 거처하실 행궁을 임차하고 수리하도록 부탁하였다

고종 독살로 망명 기도 실패

▲ 고종 독살설이 ‘무근허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9년 3월 16일자 기사.
▲ 고종 독살설이 ‘무근허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9년 3월 16일자 기사.

그러나 이같은 망명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고종이 급서했기 때문이었다. 1919121일의 일이었다. 이후 이회영은 독립선언의 계획이 확정되어 진행되고 있는 국내 상황을 보고 해외동지들에 대한 연락과 대비를 위해 서둘러 빼이징으로 가 2월 중순에 동생 이시영과 합류했다.

우당 이회영과 월남 이상재 선생 등이 추진했던 고종황제의 해외 망명은 고종황제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실패했다. 만약 성공했더라면 고종황제가 해외에 가 있는 것 자체가 국내의 조선 민중을 향해 일제에 맞서 무장 투쟁하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어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는 일제에게는 고종 독살의 충분한 이유가 되는 셈이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120일이다. 자세한 병명에 대한 언급도 없이 그날 병이 깊어 동경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그 다음날 묘시(오전 6시경(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라는 비공식적 방법을 통해 발표했는데 사인은 뇌일혈이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사망한 데 대해 의혹이 일면서 독살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이완용 등이 두 나인에게 독약을 탄 식혜를 올려 독살했는데 그 두 명의 나인도 입을 막기 위해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그의 자서전인 <운명의 여진>에서 고종의 생질 조계진이 고종 사후 5일 후 운현궁에 갔다가 이런 내용을 듣고 부친에게 전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로 보아 왕실 사람들도 독살설을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상도라는 사람은 그가 남긴 <기려수필>에서 역신 윤덕영, 한상학, 이완용이 태황을 독살했다.” 라고 이름까지 거명하고 있다.

1919315, 16일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에 고종 서거에 대한 이왕직의 해명 기사가 났다. 그날밤 고종이 식혜를 마시긴 했지만 여러 나인과 함께 마셨으며 그 후 안락의자에 앉아 자다가 새벽 115분쯤 갑자기 !’ 소리와 함께 뇌일혈이 왔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또 모의 사주를 받아 식혜에 독약을 타 드렸다는 궁녀 2인도 함구를 위해 독살했다고 하지만 병사가 확실하다는 소식을 덧붙였다. 그 중 한명은 감기에 걸려 동소문 밖 모처에 있다가 123일 죽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고종 사후 낙담하다가 22일 기침을 하다 피를 토하고 사망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독살설을 부인하기 위해 이 기사를 냈지만 고종이 식혜를 마셨다는 사실과 두 궁녀가 고종 사후 석연치 않게 사망했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에 고종 독살설은 오히려 증폭되었으며 고종 황제의 인산일을 이틀 앞둔 31일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의 불길이 치솟았다.

이상재 선생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당시 거물급에 속하는 민족지도자였다. 이상재 선생이 민족대표에 들지 않은 것은 직접 운동의 일선에 나서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까닭도 있었지만, 만세 사건 이후의 수습과정에서 일제와 맞서 일을 처리할 인물이 그 밖에 달리 없었던 때문이었다.

▲ 고종 황제는 1월 22일 비운의 생을 마감했지만 이후 독살설 등이 퍼지면서 일본에 대한 민족적 증오감이 심화됐고, 장례 기간인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선포됐으며 독립 만세 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 고종 황제는 1월 22일 비운의 생을 마감했지만 이후 독살설 등이 퍼지면서 일본에 대한 민족적 증오감이 심화됐고, 장례 기간인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선포됐으며 독립 만세 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월남 선생은 배후에서 각 종교 계파 간 얽힌 문제를 잘 풀어 단결시키는데 공헌을 했는데, 일본 경찰은 31운동 직후 선생을 잡아 눈앞에 무시무시한 고문도구를 늘어놓고 주도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옳지! 왜놈들은 자기 부모도 치는 무지막지한 놈들이라더라. 그래, 늙은 나를 치려거든 어서 쳐 보아라!”

가미우찌(上內) 형사는 차마 고문을 하지 못하고 이야기로 심문을 계속했다.

이 운동은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

이천만 민족이 다 같이 시작했다. 이천만 인심(人心)의 발로이다

아니, 그런 막연한 대답 말고 구체적으로 말하라.”

하나님의 지시로 했다.”

당신이 한 짓이 아닌가?”

나도 했다.”

연루자는 누구인가?”

연루자는 없다. 독립운동은 자의 뜻 그대로, 결국 자기 혼자서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배후에 무슨 흑막이 있을 테지?”

흑막? 그런 것은 없다. 2만 명이나 되는 경찰과 형사들이 전국에 거미줄처럼 깔렸으면서도 너희가 그것을 몰랐다니 말이 되는가? 이제 와서 흑막 운운하는 것은 이토록 문제가 커지니까 책임을 회피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 군민들의 모금으로 2012년 10월 31일 서천읍 군사5거리에 세워진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
▲ 군민들의 모금으로 2012년 10월 31일 서천읍 군사5거리에 세워진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

 

누가 심문하고 누가 심문을 당하는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이상재 선생은 오히려 당당하게 검사를 다그쳤다.<출처/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사업회>

임시정부 수립과 민주공화정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에 설립된 입법기관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헌법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임시의정원은 1919410일 개원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 재민과 삼권분립의 민주 정치 이념을 담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임시헌법) 10개조를 채택했으며 권력의 소재를 군주에서 국민으로 옮기고 민주공화제를 선언해 정부형태와 국정운영에서 민족 역사상 가장 큰 변혁을 가져왔다.

임시정부는 이 해 9월 제1차 헌법 개정을 했으며 858조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헌법과 비슷한 체계를 갖추었다. 이후 임시정부 기간 동안 5차의 개헌이 있었으며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된후 헌법이 제정되고 여러 차례 개헌이 있었지만 헌법 전문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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