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1) /장두전(杖頭錢)
■ 박일환의 낱말여행(1) /장두전(杖頭錢)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2.05.24 18:15
  • 호수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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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박일환 시인의 글을 매주 연재합니다. 박일환 시인은 시집으로 덮지 못한 출석부, 등 뒤의 시간등이 있으며, 우리말과 국어사전에 관심이 많아 국어사전에서 캐낸 술 이야기, 맹랑한 국어사전 탐방기, 국어사전이 품지 못한 말들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최근에는 영화와 시를 다룬 문학시간에 영화 보기-한국영화로 만나는 시와 시인들을 출간했습니다. 박시인과 함께 우리말을 탐구하며 떠나는 여행,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편집자>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지팡이 손잡이에 매단 술값

술꾼이 술값 없어 술을 못 마셨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술값이 없으면 외상을 긋더라도 일단 마시고 보는 게 술꾼들의 생리다. 오죽하면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옷 사 입는 대신 그 돈으로 술을 마시겠다는 내용의 시를 쓴 시인이 다 있겠는가. 그래도 남에게 신세 지기 싫어하는 술꾼은 자신이 마실 술값 정도는 지니고 다니는 게 도리라고 생각할 법하다. 호기롭게 한턱 내지는 못할망정 남에게 빌붙어서 공술은 마시지 않겠다는 자존심 센 술꾼도 물론 있을 테고.

국어사전을 보다 술값을 뜻하는 독특한 낱말을 만났다. 요즘에 통용되는 말은 아니라서 이런 낱말이 있는지도 모를 사람이 대부분이겠다.

장두전(杖頭錢): 길을 갈 때에, 술값으로 가지고 다니는 몇 푼의 돈.

돈을 뜻하는 전()자 앞에 놓인 한자어가 별도로 표제어에 있다.

장두(杖頭): 지팡이의 머리. 곧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을 이른다.

지팡이 손잡이와 돈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고, 그게 왜 술값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됐는지 궁금하다. 분명 무슨 사연이나 얽힌 이야기가 있을 텐데, 국어사전의 뜻풀이만 가지고는 짐작할 길이 없다. 이럴 때는 고민하지 말고 검색을 해보면 된다. 과연 어렵지 않게 관련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진()나라의 완수(阮脩)라는 사람으로 호를 써서 완선자(阮宣子)라고도 한다. 이 사람은 길을 나설 때마다 지팡이 손잡이에 돈 백전(百錢)을 매달고 다녔는데, 주막을 만나면 그 돈으로 취할 때까지 혼자 술을 진탕 마셨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말이 장두백전(杖頭百錢)인데, 이 말을 줄여서 장두전(杖頭錢)이라고 한다. 진서(晉書)』 「완수전(阮脩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술을 좋아하는 이야 고금에 널렸지만 그중에서 천상병 시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천상병 시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오백 원이나 천 원씩 달라고 졸라 그 돈으로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다가 1967년에 조작 간첩 사건인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는 바람에 정신과 육체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때 끌려간 이유가 사건의 주역으로 몰려 있던 친구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막걸리값으로 총 36500원을 받았는데, 그걸 공작금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천상병 시인은 그 후 자신의 건강을 돌보아주던 목순옥 여사와 결혼했고, 인사동에 자신의 대표작 이름을 딴 귀천(歸天)’이라는 카페를 열었다. 운영은 물론 목순옥 여사가 도맡았고, 천상병 시인은 아내에게 매일 이천 원씩 용돈을 받아 생활했다. 그 돈으로 천 원은 잔치국수를 사 먹고 오백 원은 막걸리 한 사발을 사서 마셨다. 그래도 남는 오백 원은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사주는 데 썼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의 아내가 매일 쥐여 주던 그 돈이 일종의 장두전(杖頭錢) 아니었을까? 아내에게 장두전을 받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집을 나서던 천상병 시인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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