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16) / 지치(智齒)
■ 박일환의 낱말여행 (16) / 지치(智齒)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2.09.29 09:24
  • 호수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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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들이 먼저 번역한 서양 전문용어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도서인 타펠 아나토미아(Tafel Anatomia)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1774년에 출간한 책이다. 당시 일본 의사들은 서양에서 들여온 의학서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특히 해부학 책에 나온 인체 해부도가 실제 인체의 구조와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의 놀라움은 서양 의학에 대한 지적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를 포함한 세 명의 일본 의사가 이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료타쿠만 아주 약간의 네덜란드어 지식이 있었을 뿐 나머지 두 사람은 아예 문외한이었다. 게다가 제대로 된 네덜란드어 사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세 사람은 3년 동안 불철주야 번역에 매달렸고, 악전고투 끝에 최초로 서양 서적을 완역한 번역서를 낼 수 있었다. 당연히 많은 어려움이 따랐는데, 그중의 하나가 서양 사람들이 사용하는 의학용어에 해당하는 일본어 낱말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이 기존에 없던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야 했고, 그렇게 해서 신경(神經), 연골(軟骨), 동맥(動脈) 같은 말들이 생겼다.

이런 의학용어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건너온 각종 문명어와 전문어를 일본인들이 새로운 한자어를 만들어가며 번역했고, 그런 말들이 우리에게도 전해져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는 건 많은 이들이 아는 사실이다. 그런 말들을 일본식 한자어라고 해서 모두 몰아낼 수는 없는 일이고, 한편으론 일본인들이 먼저 나서준 덕에 우리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수고를 덜 수도 있었다. 구한말과 식민지 시기에 집중적으로 들어온 그런 낱말 중에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상당히 낯선 용어들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 낱말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 전문 직역에 종사하는 이들이다.

지치(智齒): <의학> 어금니가 다 난 뒤 성년기에 맨 안쪽 끝에 새로 나는 작은 어금니.=사랑니.

지치(智齒)가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치과의사들은 지금도 지치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랑니라는 좋은 우리말이 있음에도 왜 지치와 같은 낯선 한자어를 사용하는 걸까? 순우리말은 전문어나 학술어가 될 수 없고 한자나 외래어로 된 말이어야 한다는 통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전문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쓰자는 흐름이 생기면서 여러 용어들이 바뀌긴 했지만 아직도 의학계나 법학계 같은 곳에서는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힘든 용어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랑니를 서양에서는 ‘wisdom tooth’라고 부르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지혜가 생겨나는 성년이 될 무렵 돋아난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걸 일본 사람이 그대로 직역해서 만든 게 지치(智齒)라는 용어다. 지치 대신 제3대구치(第三大臼齒)라고도 하는데, 어금니를 뜻하는 대구치(大臼齒) 역시 일본에서 건너온 한자어다. 일본식 한자어를 모두 폐기하자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말이 없다면 몰라도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우리말이 있다면 어려운 한자로 된 용어들은 이제 버려도 되지 않을까? 3대구치 대신 제3어금니라고 해서 큰일이 생기거나 혼란이 발생할 것도 아니니 말이다.

끝으로 거창한 의학용어 하나만 더 소개한다. 심상성 좌창(尋常性痤瘡)이라고 부르는 병명이 있다. 그냥 여드름을 뜻하는 말이다. 여드름이 전문용어로는 부적합하다는 편견을 언제까지 고수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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