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 (31)운둔근(運鈍根)
■ 박일환의 낱말여행 / (31)운둔근(運鈍根)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1.20 09:22
  • 호수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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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하게 버려야 할 낱말들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출세나 성공하는 법을 다룬 책들이 많이 팔린다고 한다. 그런 책에는 어떤 내용이 실려 있을까? 실력을 쌓고 대인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라는 식의 말들이 주로 나오지 않을까? 그 외에 특별한 비법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대부분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으로 채웠을 것이다. 그런 책들이 많이 팔린다는 건 우리 사회에 성공에 대한 욕망이 넘치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성공 비법을 알려주는 낱말을 만났다.

운둔근(運鈍根): 사람이 성공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요소. 운이 좋고 고지식하며 끈기 있는 것을 이른다.

뜻을 보면 좋은 말이긴 한데, 아무래도 낱말의 형태가 이상하다. 한자로 된 낱말 중에 이런 식의 조어법을 가진 걸 본 기억이 드물기 때문이다. 지덕체(智德體)나 의식주(衣食住) 같은 말이 비슷한 구조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그 안에 포함된 세 요소는 따로 떼어 놓아도 독립성을 지니고 쓰일 수 있음에 반해 운둔근(運鈍根)의 세 요소는 상대적으로 그런 특성이 약해 보인다. 특히 둔()이라는 말은 긍정보다는 부정의 어감을 가진 말로 많이 쓰이고 있으며, () 역시 근기(根氣)나 근성(根性)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독립성을 가지고 다른 말과 결합해서 쓰이는 일은 드물다. 더구나 주변 사람들에게 운둔근이라는 낱말을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으니 다들 처음 보는 낱말이라고 했다.

대체 누가 저런 말을 쓰나 싶어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았더니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경영 철학을 담은 호암어록(湖巖語錄)에 실려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호암(湖巖)은 이병철이 사용하던 호이다. 그 외에는 어디서도 저 말이 쓰인 사례를 찾지 못했다.

이병철은 저 말을 어디서 보고 들었을까? 혹시 스스로 만들어 쓰던 말일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애쓰던 중 일본에서 건너온 말일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곧바로 일본어사전을 찾아보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대부분의 일본어사전에 うんどんこん(運鈍根)’이 표제어로 올라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어사전에는 운둔근(運鈍根)’과 함께 한자의 순서를 바꾼 운근둔(運根鈍)’도 동의어로 올라 있다. 그나마 운근둔은 안 가져온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걸까?

한자로 된 낱말 중에는 일본 사람들이 만든 게 많다. 특히 서양의 근대 문물과 함께 들어온 개념어와 학술 용어는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 외국말을 한자로 번역해서 만든 것들이다. 그런 말들은 이미 우리 삶과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상태라 이제 와서 버리거나 바꿀 수도 없는 일이므로 적절하게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그런 것들과 상관없고, 실생활에서도 거의 쓰지 않는 일본식 한자어들은 과감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 ‘운둔근하나만 예를 들었지만 지금 우리 국어사전 안에는 당장 버려도 되는, 아니 버려야 할 낯선 일본식 한자어가 최소한 수백 개는 실려 있다.

표준국어대사전보다 앞서 나온 신기철신용철 편 새 우리말 큰사전에도 운둔근이 표제어로 실려 있는데, 풀이를 호운(好運)우직(愚直)근기(根氣)를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일본어사전 고지엔(広辞苑)好運愚直根気라고 풀이한 것과 똑같다. 이 정도면 참고한 게 아니라 그냥 대놓고 베낀 거다. 부끄러움은 과연 누구의 몫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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