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38) / 소생수(蘇生水)
■ 박일환의 낱말여행 (38) / 소생수(蘇生水)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3.16 10:54
  • 호수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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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되는 물
박일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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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 요소이며, 건강을 위해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라는 조언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물이 몸에 좋은 건 아니다. 물을 잘못 마시거나 평소에 마시던 물이 아닌 다른 물을 갈아 마시고 탈이 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니 이왕이면 깨끗하고 좋은 물을 마셔야 한다. 생수가 불티나게 팔리고, 정수기가 가정 필수품이 되다시피 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몸에 좋거나 약으로 쓰는 물의 종류가 꽤 많이 나온다. 그중에는 요즘 시각으로는 과학적인 근거가 희박해 보이는 것들도 많다.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는 물 이름 몇 개만 소개하면 이렇다.

국화수(菊花水): <한의> 감국(甘菊) 포기 밑에서 나오는 샘물. ()을 없애는 약재로 쓰는데, 성질은 덥고 맛은 달다.
납설수(臘雪水): <한의> 납일(臘日)에 내린 눈이 녹은 물. 살충과 해독약으로 쓴다.
방제수(方諸水): <한의> 밝은 달을 향하여 조가비로 뜬 물.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어린아이의 열과 갈증을 푸는 데 쓴다.

이 밖에도 밥을 찌는 시루 뚜껑에 맺힌 물을 증기수(蒸氣水)라 하여, 이 물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빽빽하게 자라며 검고 윤기가 난다고도 했다. 이 글을 읽고 정말 그런지 시험해 보려고 드는 이들은 없을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동의보감에도 나오지 않는 물 이름 하나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소생수(蘇生水): 까무러쳤거나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먹이어 다시 살아나게 한다는 약물.

정말로 저런 약물이 있는 걸까? 최소한 약물의 성분이나 특성 혹은 출처라도 밝혔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지만 그런 내용이 없다 보니 믿음이 안 간다. 같은 사전에 환혼주(還魂酒)’라는 낱말을 싣고 전설에서,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한다는 술이라는 풀이를 달았다. 여기서는 전설에서라고 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소생수(蘇生水)에는 그런 말도 없으니 긴가민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소생수를 논하려면 먼저 활명수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활명수(活命水)1897년에 등장해서 지금까지도 팔리고 있는, 소화불량에 잘 듣는다는 의약품이다. 궁중의 선전관으로 있던 민병호라는 사람이 궁중 비법을 활용하여 여러 약재를 넣어 우려낸 약물을 개발한 다음 활명수(活命水)라는 이름을 붙였고, 동화약방을 차려 판매에 나섰다. 개발자가 궁중 출신이라는 것과 한약처럼 달여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으로 인해 활명수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나 역시 어릴 적에 부채표 가스 활명수를 애용했던 기억이 있다.

활명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얼마 안 가 유사품들이 쏟아졌다. 천일약방의 통명수(通命水), 화평당약방의 회생수(回生水), 조선상회의 활명회생수(活命回生水), 제생당약방의 보명수(保命水) 등이 나왔고, 그중에는 모범매약에서 내놓은 소생수(蘇生水)도 있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소생수는 필시 모범매약의 상품명에서 왔을 것이다. 풀이에서 그냥 이 아니라 약물이라고 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내가 소생수라는 말을 찾아본 바로는, 가뭄 끝에 내려 작물을 살아나게 하는 비라는 뜻을 담아 비유적으로 사용한 경우 말고는 없었다.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아나게 한다는 약물이라고 했으니, 요즘으로 치면 과장광고에 해당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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